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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7 : 서울의 소개팅은 쉽고도 어려워

by 범버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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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행 후 다양한 소개팅을 경험했다. 연애 경험이 적어서 초반엔 시행착오를 꽤 겪었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지만 상대방의 예의를 호의로 착각해 페이스를 오버한 적도 있다. 이를 반성하는 마음에 다음 소개팅에서는 마음에 드는 여성의 이야기를 경청했더니 이번엔 수동적이라 재미가 없다는 후기가 돌아왔다. 적극적이어도 안 되고 수동적이어도 안 되니 어쩌라는 건지 답답했다.


그렇게 소개팅 경험이 쌓이면서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다. 통계학에서는 정규분포 형태가 나타나려면 표본의 크기가 충분해야 한다고 한다. 시행 횟수라는 표본이 어느 정도 쌓이자 눈치껏 ‘아 이 분과는 만남이 이어질 것 같다’거나 ‘이 분은 가능성이 낮아 보이니 너무 무리하지 말자’ 같은 판단이 가능해지고 긴장감도 많이 줄었다.


지방에서는 은행원이 소개팅 시장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입지를 점할 수 있다. 지점 거래처 사장님들이 자신의 자녀나 지인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만날 수 있는 범위에 자연스러운 한계가 있었다. 건너건너 아는 사람이 많았고 관심 있는 여성이 알고 보니 전 애인의 지인이라든가, 지인의 전 애인이어서 곤란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체감상 지방에서는 결혼적령기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점이 지방에서 이성을 만날 때 아쉬운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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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 상태로 서울에 단신 부임했을 무렵, 이곳에서의 연애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있었다. 다양한 직업군과 폭넓은 결혼적령기 인구층 덕분에 지방과는 달리 소개팅에서 만나는 사람의 범위가 훨씬 넓었다. 다양한 직종의 여성들을 만나며 지방에서는 느낄 수 없던 자유로움과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만나본 적 없던 직업군의 이야기와 삶의 방식을 듣는 흥미로운 경험도 많았다.



그러나 진지한 관계로 나아가려 할 때 예상치 못한 큰 장벽을 만났다. ‘서울 사람’이 아니면 만나지 않겠다는 여성이 많았던 것이다. 이는 지역 차별적인 발언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이유였다. 서울이나 수도권에 연고가 없다면, 서울에서 자취하며 생활비 등 많은 비용이 들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가 어렵고 결혼 후에도 자녀 돌봄 등 유사시에 가족의 지원을 받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가벼운 만남이라면 모르겠지만 삼십대를 넘긴 나로서도 진지한 만남을 전제로 했기에 이 장벽은 몹시 높고 두터워 보였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첫 만남부터 서울에서의 정착 계획과 부모님의 수도권 연고 여부를 묻고 시작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문득 이런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소개팅에서 키 큰 여성은 “제가 키가 커서요, 상대방도 키가 좀 있었으면 해요”라고 말하고, 키가 작은 여성은 “제가 작아서요, 상대는 좀 크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이처럼, 수도권의 여성(혹은 남성)은 당연히 수도권 연고 배우자를 선호하고, 비수도권인조차도 수도권에서 자리잡기 위해 수도권 연고 배우자를 선호한다. 수도권 중심화가 심화되면서 출신지와 연고는 이제 하나의 ‘기반 자산’처렴 여겨진다.



한때는 "그런 건 걱정 마라. 은행원이 적게 버는 것도 아니고 나만 믿어라" 같은 패기 넘치는 말로 상대방의 걱정을 달래주던 낭만적인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만용을 부리기엔 나이도, 서울이라는 현실의 무대도 더 이상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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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연애. 현실의 벽에 부딪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혼자 이 노래를 들으며 휴대폰 속 연인의 사진을 지웠던 기억이 난다.


한 장씩 너를 지울 때마다 가슴이 아려와
너의 사진이 점점 흐려져
사진 속 너를 불러도 보고 너를 만져도 보고
너무 잔인한 일이야 너를 지우는 일
— 이승기, 「삭제」 중


눈물이 흘러 정말 사진이 흐려졌다. 지하철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사진을 지우던 그날의 나. 이런 때는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스럽고 안도감마저 들었다.


서울에서의 만남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비단 개인의 성향이나 출신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도권 중심으로 구축된 사회·경제적 환경 속에서 연애와 결혼은 더 이상 개인의 선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많은 젊은이들이 경제적 불확실성과 현실의 벽 앞에서 연애를 망설이고 결혼을 주저하며 출산에 대한 장벽도 높아지고 있다. 높은 부동산 가격, 낮은 출산율, 일자리의 수도권 집중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는 개인의 삶과 밀접히 얽혀 있으며, 결국 소개팅과 연애라는 일상적인 영역에서조차 낭만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우리는 둘 다 서울에 아무 연고도 없는 채 아직도 떠돌고 있다. 남들이 당연히 따지는 것들을 따지지 않고 만났더니, 이래저래 고생도 많다. 나를 만나 고생이 많을 아내를 보면 가끔 짠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어떻게 이렇게 만나게 됐나 싶어 신기하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여보, 당신 밖에 없어.”

정말이지, 내겐 아내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d8659296-d790-4001-8e31-014955ed8c2c.png 챗 gpt가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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