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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4 : 서울 한복판의 보이스피싱

by 범버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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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고객 A에게 신용대출을 해드렸는데, 다음 날 그 고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혹시 내가 추가로 대출 관련 전화를 했는지 묻는 것이었다. 고객 A는 대출금을 주거래은행 통장으로 이체한 직후 은행 본사 직원을 사칭하는 이에게 전화를 받았다. 전화 속의 사칭범은 고객에게 이렇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신용대출 후 24시간이 지나야 출금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벌써 출금하면 어떡합니까? 지금이라도 정정해서 다시 대출해야 하니 현금을 지참하고 은행 본사 1층으로 오세요.”


대출받은 금액을 출금한 직후 그런 전화를 받았으니 고객 입장에서는 전혀 의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24시간 전에 출금하면 안 된다고 미리 안내했다", "서류를 작성할 때 미리 말씀드렸는데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 "수정작업이 필요하다"는 등 강압적인 호통에 순간 얼이 빠졌다고 했다. 게다가 금융 전문 용어까지 섞어가며 설득하니 고객은 본인이 전달 사항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고 착각했다.


다행히 내가 미리 드렸던 명함에 적힌 직통 번호를 보고 재확인차 전화를 해서 망정이었다. 나는 고객에게 그런 안내를 드린 적도 없으며, 설령 정정 작업이 필요하다고 해도 본사 직원이 현금을 들고 1층에서 만나자고 할 일은 절대 없으니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최근의 보이스피싱은 과거처럼 서울중앙지검 수사관을 사칭하는 단순한 방식에서 벗어나, 고객의 금융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보하고 그 데이터를 근거로 치밀하게 범죄를 저지른다. 게다가 은행 본사 건물까지 직접 찾아오라고 당당히 유도하는 과감성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보이스피싱 범죄의 공통적인 목적은 결국 피해자가 직접 현금을 출금해 자신들에게 건네도록 만드는 것이다. 피해자가 현금을 출금하도록 설득할 때 얼마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느냐가 범죄 성공의 관건이다. 서울은 각종 관공서와 금융기관 본사가 밀집해 있어 피싱 사칭의 대상이 되기 쉽고, 현금을 인출할 인력들도 많아 보이스피싱 범죄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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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박사이트를 이용한 피싱 사례도 있다. 피해자는 도박사이트에서 우연히 거액의 잭팟이 터졌다는 메시지를 보고 흥분하지만, 돈을 출금하려면 일정 유지증거금을 입금해야 한다는 사이트의 요구를 무비판적으로 믿게 된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돈을 받기 위해 돈을 입금하라는 요구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화면에 나타난 큰 돈 앞에서는 이성을 잃는 모양이다.


이런 경우 피해자는 은행 직원이나 경찰 앞에서도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거액을 출금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피싱이 의심된다"고 설득해도, 피싱범이 미리 준 시나리오를 따라 "중고차를 현금으로 사야 할인받을 수 있다"고 끝까지 고수한다. 단계별로 미리 준비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이를 막을 방도가 없다.


있는 돈만 잃으면 다행이지만, 요즘은 모바일뱅킹을 통한 신용대출이 간편해져 대출까지 받아 피싱당하는 사례도 많다. 지방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찜질방에서 며칠을 숙식하며 여러 번에 나눠 돈을 출금해 피싱범들에게 전 재산을 넘기고 결국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안고 은행에서 눈물을 흘렸던 한 청년 고객이 떠오른다. 그는 각 금융권 대출뿐만 아니라 지인들에게 빌린 돈, 직장에서 융통한 자금까지 피싱범들에게 건넸다고 했다.


금융의 중심지이자 다양한 행정기관과 기업 본사가 밀집한 서울에서 보이스피싱은 오늘도 은밀하고 교묘하게 진화하며 피해자를 노린다. 피해자를 보호하려는 금융기관의 노력과 보이스피싱의 끊임없는 진화가 벌이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숨바꼭질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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