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노조 시위 참석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다녀오곤 했다. 평일 시위도 당일치기라 힘들지만 쉬는 날 주말 시위는 더욱 꺼려졌다. 지점과 부서별로 한 명씩 참석하게 되는데 주로 막내나 남자 직원, 미혼 직원이 차출되곤 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내가 본의 아니게 자주 시위 현장에 가게 되었다.
노조와 파업은 정치적인 행위이고 이해관계가 복잡하여 글로 옮기기에 다소 조심스럽다. 또한 정권에 따라 시위의 성격이 바뀌기도 한다. 이런 정치적 배경과는 무관하게 지극히 평범한 일개 노조원으로서의 기억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성과연봉제 논의가 뜨겁던 시기였다.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순차적으로 도입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확고했다. 일부 기관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선제적으로 도입했고 나머지 기관과 금융권은 격렬히 반대하고 있었다.
성과 중심의 문화로 연공서열과 호봉제를 타파해야 한다는 취지는 일견 좋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논의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금융업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파레토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상위 20%가 전체의 80%를 차지한다는 법칙으로 금융이 바로 이 법칙에 정확히 부합하는 분야다. 상위 20%의 고객이 대부분의 성과를 차지하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80%의 일반 고객들을 배제하거나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금융기관은 종종 관공서의 성격을 띠고 코로나 관련업무 등 정책적인 대국민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성과만으로 연봉과 평가를 결정한다면 과연 누가 범국민적이고 서민적인 업무를 담당하려 할까? 최근 수년간 금융기관에서는 실적 위주의 평가를 바탕으로 경쟁적으로 점포 수를 줄이고 있는데, 이 역시 결국 부자보다는 일반 시민들이 먼저 불편을 겪게 된다.
성과연봉제가 도입된다면 고객을 대할 때 내 성과에 도움이 되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성과연봉제는 일부 부유층에게는 별문제가 없지만, 대다수의 일반 고객에게는 피해가 가는, 금융의 본질과 맞지 않는 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의지는 확고했고 대규모 시위 직전 각 은행장을 소집하여 시위 참여를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대규모 시위 당일, 현장에는 빈자리가 눈에 띄게 많았고 사기는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이때 초청 가수가 등장했는데, 가수는 당연히 세부적인 속사정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침체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한 곡을 마친 뒤에도 분위기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금융인들의 축제! 다 같이 저를 따라 손모가지를 꺾어 보세요!"라고 외쳤다. 초상집 같은 현장에서 축제라는 표현이 나오다니. 순수한 의도였지만 해당 발언으로 인해 분위기는 더 썰렁해졌다. 가수분도 협조가 잘 되지 않는 현장 분위기에 머쓱한 얼굴로 무대를 내려갔다. 다음번에는 더 좋은 분위기에서 다시 만나길 바란다.
성과연봉제 시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로 기존 논의는 흐지부지되었고, 이미 제도를 도입했던 일부 기관에서는 성과금을 소급 환수하는 일도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성과연봉제의 본질적 문제는 정치적 사건과 맞물려 충분히 공론화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서울로 발령 난 이후에는 시위 현장을 미리 준비하는 역할로 차출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전국에서 올라오는 노조원들의 자리를 마련하는 동안, 한 시민이 우리를 향해 고래고래 욕을 하며 불만을 터뜨리거나 지나가는 차량들이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며 불만을 표현하기도 했다.
매스컴은 금융노조의 시위를 두고 '성과금 잔치'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쓰며 비판하지만, 사실 금융노조는 성과금 확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과 중심의 평가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체에서의 비판과 현실의 상황은 이렇게 엇갈리곤 한다.
물론 길을 막고 진행하는 시위에 불편함을 느끼는 시민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금융기관의 지점 축소와 폐쇄가 결국 평범한 시민들의 불편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금융노조의 주장과 시민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조금 더 차분한 시선으로, 한번쯤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봐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그토록 복잡한 도시에서 서로 얽혀 살아가는 이유도 결국 그 작은 이해의 여지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