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떠난 후, 첫 번째 생일.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했다. 출장 간 남편 대신 언니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1박 2일 제주로 떠났다. 최소한의 짐을 꾸린 배낭을 메고 공항으로 출발하는 순간부터 ‘태어난 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생에 강렬하게 기억되는 탄생. 그것은 첫 아이의 출산 경험이었다. 예정일이 며칠 지난 새벽 5시. 양수가 터진 후 2시간을 기다려도 진통이 없자 진통을 부추기려 남편의 손을 붙잡고 어디든 걸어 다녔다. 자연주의 출산을 하고 싶다는 고집 덕분에 오전 8시에 시작된 진통은 오후 9시에 끝이 났다. 진이 빠져 늘어져 있는 나의 배 위에 양수로 얼굴이 퉁퉁 부은 아기가 올려졌다. 우리의 살결이 처음으로 닿은 순간. 끝났다는 안도감과 믿기지 않는 뭉클함, 기쁘고 설레면서도 이제 진짜 부모가 되었다는 긴장감이 내 몸을 휘감았다. 그 진한 경험 덕분인지 아이의 생일이 되면 배 속에 있던 아이와 합을 맞추기 위해 온 힘을 끌어모았던 그날이 생각났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 새롭게 태어난 나. 출산 경험 이후로 누군가의 생일마다 주인공에게 축하를 건네며 그 존재를 세상에 있게 한 어머니도 함께 떠올리게 됐다. 그리고 오늘은 나의 생일. 누군가의 생일에 자연스레 그들의 부모를 떠올렸으면서 정작 내 생일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내 부모를 마음속에서 꺼내어봤다.
삶에 대해 질문하게 했던 이들. 닿아있던 살결과 체온, 서로를 위했던 마음, 사랑하고 미워했던 감정, 매서워지기도 반달이 되기도 했던 눈빛. 그 모든 것이 축복이었음을.
탄생의 축복, 삶의 여정의 축복. 지금 이 깨달음도 앞으로 살아갈 순간도 모두 축복이라는 걸 소화해 가고 있다. 과거에 대한 축복은 익숙한데 현재에 대한 축복이 낯설어 천천히 음미해 가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곱씹으며 어느새 비행기 내 좌석에 앉았다. 곧이어 내 옆자리에도 사람이 왔다.
나를 방해한 것도 아닌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주인을 탐색했다. 노년이라기엔 젊고, 중년이라기엔 많은 듯 해 보이는 나이. 그늘에서만 지낸 것 같은 하얀 피부에 옅게 박힌 검은 기미. 맑은 눈동자에 소녀 같은 이미지가 주름마저 곱다는 인상을 줬다. 우리 엄마가 이 정도 나이라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자신의 배우자와 나란히 앉아 소담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 여자가 부러웠다.
적당한 손짓과 조용한 웃음이 오고 간다. 나도 괜히 엄마의 웃음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일상에서 거의 웃지 않았구나. 내성적이고 말이 없던 성격도 있었겠지만, 그녀의 무표정은 전부 고단함 탓이었을 거다.
수많은 고단한 표정 중 선명하게 기억나는 엄마의 미소가 있다. 어딘가를 함께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늘 그렇듯 종알대는 나의 이야기를 엄마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다 명랑해진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 거는 나.
“엄마, 엄마는 어려 보여서 사람들이 내 엄마로 안 볼걸?”
“그럼?”
“음... 이모나 언니 정도?”
‘이모’와 ‘언니’라는 단어에 엄마는 참지 못하고 ‘풋’ 소리를 냈다. 하루 종일 날아다니는 나의 수다에 단련된 엄마는 웬만한 반응도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엄마의 웃음소리에 한 건 했다 싶은 나는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쑥스러운지 민망한지 수줍게 웃어 보였던 얼굴. 천진하고 해맑게, 아름다웠던 미소.
순수하게 웃어 보인 엄마의 얼굴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조각 중 그때의 엄마 모습만은 꼭 붙들어 맸다. 엄마가 이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잊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엄마를 웃게한 순간이 있었다는 걸 잊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엄마의 미소를 잠시나마 그늘진 얼굴에 피어나게 할 수 있었다는 걸.
내 옆에 앉은 낯선 여인도 누군가의 엄마일 테지. 그녀의 존재가 부러워 소리를 감춘 채 속삭였다.
‘엄마, 엄마.’
서글픔이 일렁였다. 엄마라는 단어는 이제 내게 외로움이 되어버렸나. 엄마라고 부를 때마다 질퍽한 구덩이 속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웅얼거리던 말들을 대충 삼키는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옆자리의 그녀에게 내 눈물을 들킬까 봐 작은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열심히 공기 중에 눈물을 날려 보냈다.
ⓒ Alexey Demidov, 출처 Unsplash
아빠가 떠난 후 두 번째 생일. 나의 탄생을 자축하며 어김없이 부모를 떠올렸다. 그러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우연히 영상 하나를 보게 됐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나종호 정신의학과 교수의 이야기였다.
미국의 병원에는 보통 (주마다 다르긴 하지만) 몸의 질환으로 찾아오는 환자를 돌보는 응급실과 정신질환으로 찾아오는 환자를 돌보는 정신과 응급실이 있다고 한다. 그는 레지던트 시절 뉴욕대 병원 정신과 응급실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내가 그 영상을 선택한 이유는 ‘자살은 극단적 선택이 아니다.’라는 그의 경험에서 나온 진지한 의견 때문이었다.
10분. 자살 충동을 느끼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평균적으로 걸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자살 생각은 지속해 머무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쓸려나간다고. 그러니 순간적인 개입이 자살 위험성을 낮출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또, 자살을 시도했으나 살아남은 사람 대부분은 “내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대답한다고 했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며, 자신이 사라지면 짐을 덜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자살을 생각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무엇을 해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 그러므로 이 비극에서 탈출할 유일한 길은 죽음뿐이라는 생각에 자살을 시도한다고 했다. 선택지가 없다고 느낀 사람에게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한지 나종호 교수는 질문하고 있었다.
ⓒ Bette Jane, 출처 Unsplash
엄마가 자신만을 위해 떠났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기적이고 나약하다며 엄마를 비난했었다. 아이를 키우며 엄마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고 엄마가 자유로웠길 기도했다. 기억 속 엄마와 화해했지만, 선택이라는 점에 의문을 가져 보진 않은 채로.
만약, 엄마의 상태가 이성적 사고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투병 환자였다는 생각을 하면... 엄마는 가족을 위해 떠날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우리 옆에 있다는 것을 짐이라고 생각해서,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더 못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전부, 우리를 위해서...
엄마는 살고 싶었던 거다.
살고 싶은데,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짐이 될까 봐.
살고 싶은데, 나란 인간이 세상에 필요치 않은 것 같아서.
살고 싶은데,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엄마의 머릿속에 남은 하나의 문, 죽음. 막다른 골목, 유일한 탈출구가 그것뿐이었을 때 엄마의 심정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다른 문도 많다고 해주는 이가 엄마에겐 없었다. 당신이 나에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다고 소중하다고 말해주는 이가 엄마에겐 없었다. 충동적인 생각에 휩싸일 때, 10분을 곁에서 지지해 줄 사람이 엄마에겐 없었다. 엄마 곁엔 아무도 없었다.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자주 말해줬어야 했는데.
엄마가 내 엄마라서 정말 좋다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엄마는 몰랐을 텐데.
내가 엄마를 얼마나 예쁜 사람으로 기억하는지,
엄마를 얼마나 완벽한 사람으로 기억하는지,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원했는지...
엄마를 이해하면 할수록 원망의 화살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녀에게 나의 존재만으로 힘이 되었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떠난 이유 중 '자신이 짐이 되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다'는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그 마음을 전달받아 '나 또한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하는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나의 발견이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자꾸만 아릿해졌다. 내가 슬픈 건, 그들을 이해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들을 이해하고 눈물 흘리는 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소용돌이가 파도쳤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나에게 벌주고 있는 건 아닐까. 부모를 용서하기 위해 나를 용서하지 못한 건 아닐까. 또 그 쳇바퀴 속에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건 아닐까. 나의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 걸까. 파도는 멈추지 않고 더 거세게 나를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