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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비아 Apr 06. 2023

평온하고 행복한 게 엄마인 줄 알았어

: 부모 사별자의 내면치유 애도 일기 #3


"다녀왔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집안이 조용했다. 엄마 신발은 현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엄마는 그림을 그릴 때면 현관에서 들려오는 나의 인사를 듣지 못했다. 그런 날은 엄마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베란다로 갔다.


탁 트인 베란다에 내리 쬐는 햇빛, 그 따스함을 만끽하며 미소 짓고 있는 키 큰 화분 여러 개가 창밖을 향해 사이좋게 서있다. 그 앞에 자리를 차지한 쨍한 파란색 피크닉 테이블. 촌스럽게 밝은 파란색과 테이블 위에 널려진 은은한 파스텔, 편안하게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이 은근한 조화를 이룬다. 모든 것이 엄마에게 쉬어가라 말해주는 엄마만의 안식처. 이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엄마의 모습은 언제나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스케치북 한 가운데 손바닥 만한 정사각형 테두리, 그 안에는 매번 하늘과 집, 나무와 들판이 등장했다. 여백이 더 많아 그려진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재미있는 그림. 손톱만큼 작게 그려진 그림에 정성을 가득 담으며 엄마는 그리는 것에 흠뻑 빠져 있었다. 자신의 삶을 즐긴다는 건 저런 모습일까.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속에 엄마가 어떤 마음을 담고 있는지 아홉 살의 나는 알지 못했다.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대기업에 다니던 아빠는 나에겐 먼 존재였다. 새벽 출근, 늦은 퇴근, 주말엔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잠에 드는 게 일상인 사람. 아빠는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을 만회하기 위함인지 출장에서 돌아올 땐 어김없이 언니와 나를 위한 선물을 챙겼다. 이번엔 무슨 선물을 사왔을까? 비싼 외제 초콜릿? 디즈니 캐릭터 손목시계? 내가 기다리는 것이 아빠인지 선물인지 헷갈렸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아빠가 나를 위해 무언가 준비했다는 것에 기뻐했던 건 사실이었다.


며칠간의 출장을 마치고 아빠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평일이 아닌 토요일의 입국은 언니와 나도 공항으로 마중갈 수 있는 기회였다. 새벽같이 우리를 깨워도 불평하지 않고 엄마의 지시에 따라 재깍재깍 움직였다. 웅성웅성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입국장 게이트에 도착하니 아빠를 기다리는 들뜬 마음에 흥분감이 더해졌다. 내가 제일 먼저 발견해야지, 여기야 하고 손을 흔들어 줄 거야. 걸어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꼼꼼히 확인했다.




아빠를 만나 모두가 주차장을 향해 가는데 앞장서야 할 엄마가 제일 끝에서 걸어왔다. 이동할 때 꾸물대며 끝에 걸어오는 것은 나인데 그런 나보다 엄마는 더 느리게 걸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엄마가 의아해 수시로 뒤를 확인했다. 초점 잃은 눈과 굳게 다문 입. 나는 쪼르르 달려가 엄마의 손을 잡고 얼른 가자며 재촉했다. 마지못해 내민 엄마의 손에는 냉기가 돌았다. 시간이 지난 후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당시 엄마는 입국장에서 아빠 옆에 있는 누군가를 봤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출발한지 한참 지났는데도 엄마와 아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때 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엄마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깼다.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는 끅끅 소리. 무슨 일일까, 백미러를 통해 아빠의 표정을 몰래 훔쳐봤다. 한껏 찌그러져있는 미간, 커다란 뿔테 안경 사이로 선명하게 보이는 냉담한 눈빛. 아빠는 그런 엄마가 꼴 보기 싫다는 듯 “그만 좀 울어라!” 세차게 소리를 질렀다.


매서운 눈보라로 변한 아빠의 호통이 내 몸을 꽁꽁 얼려버린다. 숨을 쉬면 입김이 보일 것만 같은 차디찬 공간. 불안함에 크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심기를 건드리면 어쩌지.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의 배경처럼 우리도 어서 집으로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그날 밤. 잘까 싶어 침대에 누웠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모른 척 잠 들 수가 없어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소리의 근원지는 아빠의 서재였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방 안을 힐끗 쳐다봤다.


하늘로 솟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엄마를 쏘아보는 아빠. 엄마는 팔짱을 꼈다가 삿대질을 했다가를 반복하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공항이라는 단어가 몇 번 들렸지만 더 이상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괜히 봤다 싶어 자리를 피하려하는데 발이 땅에 묶였는지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 때, 방문이 활짝 열렸다. 아빠의 몸이 이렇게 위협적으로 변할 수 있었던가. 길고 두툼한 팔이 반질반질한 야구 방망이가 되어 막아서는 엄마를 향해 돌진했다. 퍽. 엄마의 몸이 이렇게 가볍게 움직인 적이 있었던가. 누가 끌어당기는 듯 한순간에 거실로 날아갔다. 자신의 일에 왈가왈부하는 엄마를 향해 내린 아빠의 처벌. 처벌을 내린 자의 얼굴에 미안함이란 없었다. 쾅! 벽에 붙은 액자가 떨어질 듯 흔들리며 몸을 떨었다.


거실바닥에 엎어진 엄마는 서러운 듯 분한 듯 으로 울었다. 엄마에게 달려가 괜찮냐고 묻는데 내 얼굴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가 더 크게 울수록 불안한 마음이 증폭되어 손과 발이 제멋대로 떨렸다.


다음 날, 엄마는 집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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