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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비아 Apr 21. 2023

엄마라는 금기어

부모 사별자의 내면치유 애도 일기 #5


엄마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 날, 검은 옷을 입은 삼촌과 고모들이 우리 집으로 모였다. 어른들끼리 소파에 둘러앉아서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말을 주고받으며 눈물을 닦고 한숨 쉬기를 반복했다. 눈치 없는 척 거실 주변을 왔다 갔다 해 보는데 내가 나타나면 말소리를 줄이거나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끼워주지 않겠다 싶어 방에 들어가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때웠다.


배가 고파져 거실로 나왔는데 아빠를 제외한 다른 어른들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 함께 어디를 간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게 어디인지 왜 가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래위로 까맣게 차려입은 아빠에게 ‘우리는 같이 안 가?’ 물어보았지만 아빠는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스름한 저녁이 되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나를 데려가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 조르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엄마의 죽음이 부끄러웠던 걸까, 아니면 적잖은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어른들은 언니와 나를 장례식장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 후로 아빠는 엄마의 기일을 챙기지 않았고 친척들도 우리 앞에서 엄마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 앞에 벌어지는 상황들이 의아하면서도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벅차 생각할 틈이란 끼어들 수 없었다. 엄마의 죽음은 시작에 불과했다.       





엄마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IMF로 정리해고됐다. 금방 다른 일자리를 구했지만, 그곳은 지방이었다. 아빠는 자리를 잡으면 데리러 오겠다며 언니와 나를 당시 신혼부부였던 고모에게 맡겼다. 아빠를 볼 수 있는 건 주말이었지만 그것도 매번은 아니었다. 올 때도 있었고 일이 많으면 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아빠가 온다고 한들 내게 특별히 잘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빠가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빠가 있을 때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냥, 마음이 편했다.      


엄마의 일 이후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학교도 잘 다녔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나를 그렇게 대했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주말에 자주 놀던 남자아이와 그 친구들 무리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내가 지나갈 때 그들은 나를 두고 수군거렸다.      



"쟤네 엄마 죽었잖아."      


나도 너희들처럼 엄마가 죽어서 내 곁을 떠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에게 모진 말을 내뱉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엄마 없는 아이’로 낙인을 찍은 건 나였을까, 그들이었을까. 나라는 사람은 변한 게 없는데 엄마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들과 나 사이에 알 수 없는 경계선이 느껴졌다. 그 자리에서는 그렇게 밝게 웃으면 안 된다고, 명랑하면 안 된다고. 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듯했다.



“우리 집엔 엄마 없어.”     


그 이후로 누군가가 나에게 엄마 얘기를 묻거나 대화의 흐름에서 엄마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의아해할 때, 오히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떤 감정도 담지 않고 담백하게. 


'이런 것쯤은 약점이 아니야. 나에게 엄마가 없지만 나도 너희와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어.' 라고 센척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꺼내려 하면 머리보다 빠르게 가슴이 반응했다. ‘그래, 이제 엄마는 내 곁에 없어.’ 부정은 더욱 강한 확인 사살 다가왔다.


‘난 괜찮아, 근데 거짓말은 싫어. 네가 궁금하다면 이야기 해줄 수도 있어. 사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기도 해.’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얘기를 묻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묻지 못했을 거라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엔 어려운 나이었다. 그저 나의 외로움을 들키는 게 수치스러워 ‘없다’는 말을 반복해 가며 냉담해져야 했다.      



낮에는 엄마를 부정하고, 밤에는 엄마를 기억하는 날이 되풀이됐다. ‘엄마는 왜 떠났을까?’, '죽는다는 게 뭘까?', ‘나는 왜 살고 있는 걸까?’, '산다는 게 뭘까?'.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외롭고 혼란스러웠다. 답을 찾는다 해서 엄마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면 다 소용없는 일 같았다.


엄마를 세상에 없었던 사람처럼 포장하는 어른들에게도, 빈자리의 깊은 절망을 이해 못하는 친구들에게도, 터놓지 못하는 심정을 차라리 내가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얘기해 봐. 내가 다 들어줄게. 엄마 많이 보고 싶지? 나도 그래. 내가 널 위로해 줄게.’

혼자 하는 1인 2역이 우습기도 슬프기도 했지만, 눈치 보지 않고 터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후련했다. 속상함이 차오르고 눈물이 솟구칠수록 아빠가 데리러 오기만을 바랐다. 아빠만 옆에 있다면 다 괜찮아질 거야, 나를 다독였다.           





1년이 지나고 겨울방학 무렵. 아빠는 약속대로 우리를 데리러 왔고 우리 가족은 지방으로 이사했다. 엄마가 있을 때보다 두세 배나 작아진 좁은 집에 미처 풀지 못한 이삿짐 박스가 방과 거실에 한가득했다. 언니와 나는 밖에서 놀다 집에서 놀다 하며 아빠를 기다렸다.


어느 날 아빠는 미숙한 솜씨로 요리를 해놓고 우리가 심심할까 마음이 쓰였는지 자신이 사용하던 워크맨을 우리에게 주고 갔다. 언니와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이어폰을 사이좋게 나누어 꼈다.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들었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차가운 방의 냉기도, 발 디딜 틈 없는 공간도 다 괜찮았다. 이곳은 우리 가족만의 공간이었고, 아빠도 매일 만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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