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편에 서야 한다면, 아빠 편에 설게
부모 사별자의 내면치유 애도 일기 #6
새로운 곳이 익숙해질 무렵 아빠는 우리에게 어떤 여자를 소개해줬다. 큰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언니’라는 말이 어울리는 젊은 여자를. 아빠는 그 여자를 만날 때면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했다.
하루는 거금 만원을 우리 손에 쥐어주고는 자신들은 카페에서 기다릴 테니 오락실에서 실컷 놀고 오라고 했다. 세 시간 동안 틀린 그림 찾기에 모든 돈을 탕진하고 언니와 함께 아빠를 찾으러 갔다. 카페의 문을 열고 아빠를 찾는데 하얀 패브릭 소파에 어깨를 맞대어 앉아 있는 키 큰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올라가는 입 꼬리, 팔짱 낀 채 서로의 손을 꼭 잡은 모습이 마치 연인 같았다. 아빠가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아빠의 표정을 따라지어 보았다. 왠지 나도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그 여자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집에서 며칠씩 지내고 갔다. 놀러 오는 횟수가 늘어나고 자고 가는 날도 많아졌다. 우리가 없을 때만 몰래하던 두 사람의 스킨십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낌 없이 당당해졌다. 나는 그 모습도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깊어지던 사이가 시들해졌는지 1년이 지나자 그 여자가 집에 오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갔다. 아빠는 자주 그 여자와의 통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었고 그 여자에게 연락이 오면 절대 받지 말라고 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끝이 났다.
어느 날, 그 여자의 얘기를 들은 고모가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아직도 걔를 만나고 있었어? 걔는 절대 안 돼. 걔 때문에 새 언니가...
아무튼, 아빠가 그 여자랑 못 만나게 해야 해! 알겠지?"
아직도? 그 여자 때문에 엄마가 왜?
차 안에서 울던 엄마의 모습을 시작으로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 여자가 모든 사건의 중심이었다니. 고모의 말이 당혹스러워 언니에게 달려가 물었다. 언니는 당연히 안다는 듯이, 그래서 그 여자가 싫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을 우연이라고 믿은 내가 등신 머저리 같았다.
'누구 때문에 엄마가 이렇게 됐는데!'
그 여자에게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제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남몰래 그 여자에게 마음을 열었던 나 자신이었다. 나에게 남은 하나뿐인 동아줄, 아빠. 그런 아빠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었는데..
'넌 엄마를 벌써 잊은 거야? 괘씸한 년.'
아빠를 탓할 수 없는 나의 분노가 그 여자를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머릿속의 누군가가 나타나 나에게 채찍질을 해댔다. 심장 한가운데 소용돌이가 만들어져 내 심장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매일 밤, 엄마를 떠올렸다. 죄스러운 마음에 소리 낼 수조차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웅크린 채 온몸이 흔들리게 울었다.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 바르르 떨리는 몸 안으로 심장이 칼에 베인 듯 시리게 찢어졌다.
엄마를 그리워할 자격도 없는 나. 그런 내가 꺼내서는 안 될 것 같은 말, ‘보고 싶어’. 그 말은 매번, 기어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럴 때면 심장이 너덜거릴 때까지 소용돌이는 멈추지 않았다. 고통이 클수록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용서받는다고 생각해 그 고통 속에 자꾸 나를 밀어 넣었다.
밤마다 울며 잠들던 어느 날, 술 한 잔 못하는 아빠가 만취상태로 들어왔다. 비틀 거리며 겨우 안방에 들어간 아빠는 부엌 빛으로 어둠이 조금 거둬진 안방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걱정되어 근처를 서성이는데 잔뜩 꼬인 혀로 나를 불러 앉히고 미안하다는 말을 두어 번 반복해 댔다. 축 늘어진 어깨와 생기 없는 얼굴. 갈 곳 잃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 때문에 힘든 걸까? 아빠가 떠나갈까 덜컥 겁이 났다. 아빠에게 마저 짐이 되면 안 되는데.. 아빠의 어깨를 누르는 삶의 무게가 내 마음에 얹어졌다. 미안하다는 말을 한 건 아빠인데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것 같았다. 아빠는 나랑 있는데 왜 행복하지 않은 걸까,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내가 밤마다 엄마를 그리워했다는 걸 아빠가 알게 된 것일까?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엄마를 떠올리는 것은 아빠를 배신하는 일 같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나 커다란 발로 내 심장을 꾹 눌러 밟았다. 엄마에게 미안했지만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기로 했다.
사춘기를 맞으며 잠들어있던 마음이 뾰족하게 깨어났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바라볼 때마다 밝고 당당했던 내 모습이 아닌 싸늘한 눈빛에 부루퉁한 내가 서 있었다. 둥글었던 마음에 안팎으로 가시가 돋아나 어디든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나를 두고 떠난 엄마. 남겨진 우리 따위는 어떻게 되든 안중에도 없었겠지. 부모라면, 낳았으면, 이렇게 무책임할 순 없는 거다. 나약한 인간, 이기적인 인간.
'그렇게 떠나버리면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나를 사랑하기나 한 거야??!!'
비난하는 만큼 엄마에 대한 시선이 차가워졌다. 나에게 엄마가 있었던가, 코웃음이 나왔다. 그리움, 슬픔, 미움과 함께 곁에 없는 엄마의 기억을 차례로 지워나갔다. 몇 안 되는 좋았던 기억들마저 사라지게 내버려 뒀다.
엄마를 배신한 아빠. 감히 그 여자를 우리에게 데리고 오다니.
'엄마와 우리에게 부끄럽지도 않았어??!!'
울분을 토해내며 원망 섞인 말들을 뱉어보지만 이상하게 아빠만큼은 마음대로 미워할 수가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나면 그 크기만큼의 미안함이 가득 차올라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말 없고 나서기 싫어하는 고지식한 부산사나이였던 과거의 아빠는 없었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던 그날부터 아니 엄마가 떠난 이후부터, 아빠는 두 딸을 책임지기 위해 기꺼이 노력해 왔었다. 동네시장에서 반찬값을 흥정하고 딸들을 위해 생리대의 브랜드를 꿰고 있었으며, 소풍날이면 옆구리 터진 김밥을 늘 말아주었다.
나를 위해 헌신한 대가로 아빠가 저지른 과거는 덮기로 했다. 생활 속에 배어있는 아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아빠를 용서해 갔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제일 중요했던 것은 아빠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