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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비아 May 12. 2023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날도 있다는 것을

부모 사별자의 내면치유 애도 일기 #8


어릴 때 겪었던 엄마의 부재가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마음 저편에 밀쳐둔 엄마를 꺼내본 적은 없었다. 엄마의 조언이나 격려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법한 결혼, 출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나에게 엄마가 떠오르는 날이 생겼다.      


백일이 좀 안 된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할 때였다. 속싸개로 동여맨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아이가 먹기 좋을 위치를 찾아 자세를 잡았다. 아이는 꼬물대던 입으로 잽싸게 유두를 찾아 왕 물고는 내 가슴에 시선을 고정했다. 곧 두둑해진 배에 여유가 생겼는지 동그랗고 까만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의 것을 내어주고 그것을 받아먹는 아이, 우리 사이에 흐르는 원초적 교류. 아이가 나에게 의지하는 순간, 나도 이 아이에게 의지하게 될 것 같은 직감. 나를 무장해제 시키는 아이에게 빠져있 때, 틀어놓았던 라디오의 진행자가 자신의 엄마와의 에피소드를 꺼냈다.           


아..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었지.’      


내가 되고 싶은 엄마라는 역할에만 집중했지 나에게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이와 나 사이에 연결된 투명하고 단단한 탯줄을 느끼는 그 순간, ‘나의 엄마’라는 두 문장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왔다.           


 "엄마, 우리 아이 참 예쁘지? 내 가슴을 움켜쥔 조막만 한 손, 탱탱하게 살이 오른 두 볼, 맑고 진한 눈동자. 엄마가 이 아이를 봤다면 나만큼이나 좋아했을 텐데...

  작고 여리던 내 모습도 기억나? 엄마만이 세상에 전부인 줄 알았던 나를 보면서 엄마도 행복했겠지? 오늘따라 엄마가 보고 싶네..."           


살기 위해 엄마를 잊을 수밖에 없던 날들은 이제 지나간 것일까. 내 마음에 엄마가 들어오길 기다렸던 걸까. 꽁꽁 묶어두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의 끈이 그날부터 조금씩 느슨해졌다.





직업 특성상 남편은 6개월 출장과 3개월 휴가를 반복했다. 양가 부모님의 도움도 받기 어려운 상황에 육아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었다. 처음엔 순항하던 육아도 시간이 흐르자 버거워지는 날이 하나둘 생겼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 오기로 한 날을 자꾸 확인했다.           


아이가 18개월쯤인 어느 날, 한 달 뒤에 돌아오게 될 남편의 귀국이 한 달이나 더 늦춰졌다고 했다. 두 달이나 더 기다려야 된다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도망갈 구석도 없었다. 어떻게든 힘을 내야 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새벽 명상을 해보지만 아이는 번번이 깨어 나를 찾았다. 아이를 다시 눕히느라 1시간 동안 명상은 5분밖에 하지 못한 날, 밟아도 밟히지 않는 꽉 찬 쓰레기봉투 안의 쓰레기처럼 더 이상 눌러지지 않은 것들이 한데 터져나왔다.           


때마침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내 얘기를 들어보라며 다짜고짜 퍼붓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힘든데 애가 날 도와주지 않잖아!"      


갈비뼈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팔을 타고 손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오타 섞인 메시지가 연타로 날아갔다.           


"이 년이! 자란 잠은 안 자고 엄마를 힘들게 하네!"     


내 마음을 눈치챈 남편이 농담 섞인 말투로 아이를 심하게 탓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약간의 비속어가 담긴 남편의 거친 표현에 묘한 쾌감이 생겼다.           


푸하하하!!!

... 하... 흐... 흑......          


통쾌함에 주체 못 할 정도로 웃음이 나왔는데 기분 째지게 웃고 나니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을 시작으로 눈물이 엉엉 쏟아졌다. 나 미쳤나 봐, 하면서도 울컥함이 멋질 않았다.                



좋은 엄마라는 열정이 나를 집어삼켰나. 감정에 휩싸여 부정적인 언행이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이성이 등장해 그런 나를 ‘꿈꾸던 엄마의 모습’과 비교하며 제지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든 일이 사실임에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격을 들추며 힘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꿈꿔오던 엄마가 되었으니까. 나는 아이를 사랑하니까.           


매일 같은 일상, 힘에 부치는 날엔 두 세배로 쓰이는 에너지. 스스로 컨트롤하기도 버거운데 아홉 번을 잘해줘도 하나가 틀어지면 울어 재끼는 아이를 보면 다 두고 도망가고 싶었다. 다 내려놓고 싶었다.           


누군가의 인생이 온전히 내 손에 달려있다는 책임감, 그 책임감을 외면하고 싶은 순간이 오자 마음이 괴로웠다.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사라지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 열심히 살아내고 있었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복잡함이 한데 뒤섞였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날도 있다는 삶의 진실. 그 사실에 나를 떠난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는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엄마가 나를 바라보던 눈, 말 대신 해줬던 사랑의 표현들. 내가 해낼 때는 나보다 더 기뻐하고, 내가 해내지 못할 때는 나보다 마음 아파하며, 나라는 존재를 만나 엄마가 웃고 행복해하던 시간들. 엄마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음을. 나라는 사람으로서 오롯하게 살 수 없는 날을 확인하게 되면 본능을 위협받은 짐승처럼 자신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나답게 존재해야 숨 쉴 수 있다고 말하는 몸의 신호와 당신은 엄마이기에 참고 견뎌야 한다는 머리의 신호가 충돌해 숱한 시간을 괴로움으로 보냈을 엄마의 시간이 눈앞에 그려졌다.           


'엄마는 삶을 향해 절규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어릴 적 내 심장을 흔들던 소용돌이가 오랜만에 나를 찾아와 강하게 휘몰아쳤다.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는 그 소용돌이가 두려웠던 날들이 떠올랐다. 눈을 질끈 감고, 고요한 중심으로 한 발씩 내디뎠다.          



'엄마의 선택이 아내, 엄마가 아닌 자신만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좋겠어.

 그것이 꼭 삶을 이어 나가는 것이 아니었더라도 괜찮아.

 그 순간만이라도 엄마가 자유로움을 느꼈다면 그걸로 충분해.

 엄마가 있는 그곳은 엄마가 꿈꾸던 것들이 가득한 곳이기를 바랄게.

 엄마가 행복해하며 그리던 그림처럼...'           


비틀리던 심장의 고통이 점점 작아진다. 이 고통이 나에게 내리는 벌이 아니라 엄마를 그리워하는 슬픔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죄책감에 시달려 외면했던 엄마를, 엄마가 되고 나서야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떠나보내는 이 순간이 새로운 시작처럼 느껴졌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또 만나게 될까. 희로애락, 그 지점이 어디든 나의 출발은 여기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엄마였다는 것을. 엄마 덕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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