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곳이 익숙해질 무렵 아빠는 우리에게 어떤 여자를 소개해줬다. 큰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언니’라는 말이 어울리는 젊은 여자를. 아빠는 그 여자를 만날 때면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했다.
하루는 거금 만원을 우리 손에 쥐어주고는 자신들은 카페에서 기다릴 테니 오락실에서 실컷 놀고 오라고 했다.세 시간 동안 틀린 그림 찾기에 모든 돈을 탕진하고 언니와 함께 아빠를 찾으러 갔다. 카페의 문을 열고 아빠를 찾는데 하얀 패브릭 소파에 어깨를 맞대어 앉아 있는 키 큰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올라가는 입 꼬리, 팔짱 낀 채 서로의 손을 꼭 잡은 모습이 마치 연인 같았다. 아빠가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아빠의 표정을 따라지어 보았다. 왠지 나도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그 여자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집에서 며칠씩 지내고 갔다. 놀러 오는 횟수가 늘어나고 자고 가는 날도 많아졌다. 우리가 없을 때만 몰래하던 두 사람의 스킨십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낌 없이 당당해졌다. 나는 그 모습도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깊어지던 사이가 시들해졌는지 1년이 지나자 그 여자가 집에 오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갔다. 아빠는 자주 그 여자와의 통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었고 그 여자에게 연락이 오면 절대 받지 말라고 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끝이 났다.
어느 날, 그 여자의 얘기를 들은 고모가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아직도 걔를 만나고 있었어? 걔는 절대 안 돼. 걔 때문에 새 언니가...
아무튼, 아빠가 그 여자랑 못 만나게 해야 해! 알겠지?"
아직도? 그 여자 때문에 엄마가 왜?
차 안에서 울던 엄마의 모습을 시작으로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 여자가 모든 사건의 중심이었다니. 고모의 말이 당혹스러워 언니에게 달려가 물었다. 언니는 당연히 안다는 듯이, 그래서 그 여자가 싫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을 우연이라고 믿은 내가 등신 머저리 같았다.
'누구 때문에 엄마가 이렇게 됐는데!'
그 여자에게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제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남몰래 그 여자에게 마음을 열었던 나 자신이었다. 나에게 남은 하나뿐인 동아줄, 아빠. 그런 아빠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었는데..
'넌 엄마를 벌써 잊은 거야? 괘씸한 년.'
아빠를 탓할 수 없는 나의 분노가 그 여자를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머릿속의 누군가가 나타나 나에게 채찍질을 해댔다. 심장 한가운데 소용돌이가 만들어져 내 심장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매일 밤, 엄마를 떠올렸다. 죄스러운 마음에 소리 낼 수조차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웅크린 채 온몸이 흔들리게 울었다.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 바르르 떨리는 몸 안으로 심장이 칼에 베인 듯 시리게 찢어졌다.
엄마를 그리워할 자격도 없는 나. 그런 내가 꺼내서는 안 될 것 같은 말, ‘보고 싶어’. 그 말은 매번, 기어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럴 때면 심장이 너덜거릴 때까지 소용돌이는 멈추지 않았다. 고통이 클수록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용서받는다고 생각해 그 고통 속에 자꾸 나를 밀어 넣었다.
밤마다 울며 잠들던 어느 날, 술 한 잔 못하는 아빠가 만취상태로 들어왔다. 비틀 거리며 겨우 안방에 들어간 아빠는 부엌 빛으로 어둠이 조금 거둬진 안방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걱정되어 근처를 서성이는데 잔뜩 꼬인 혀로 나를 불러 앉히고 미안하다는 말을 두어 번 반복해 댔다. 축 늘어진 어깨와 생기 없는 얼굴. 갈 곳 잃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 때문에 힘든 걸까? 아빠가 떠나갈까 덜컥 겁이 났다. 아빠에게 마저 짐이 되면 안 되는데.. 아빠의 어깨를 누르는 삶의 무게가 내 마음에 얹어졌다. 미안하다는 말을 한 건 아빠인데잘못은 나에게 있는 것 같았다. 아빠는 나랑 있는데 왜 행복하지 않은 걸까,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내가 밤마다 엄마를 그리워했다는 걸 아빠가 알게 된 것일까?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엄마를 떠올리는 것은 아빠를 배신하는 일 같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나 커다란 발로 내 심장을 꾹 눌러 밟았다. 엄마에게 미안했지만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기로 했다.
사춘기를 맞으며 잠들어있던 마음이 뾰족하게 깨어났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바라볼 때마다 밝고 당당했던 내 모습이 아닌 싸늘한 눈빛에 부루퉁한 내가 서 있었다. 둥글었던 마음에 안팎으로 가시가 돋아나 어디든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나를 두고 떠난 엄마. 남겨진 우리 따위는 어떻게 되든 안중에도 없었겠지. 부모라면, 낳았으면, 이렇게 무책임할 순 없는 거다. 나약한 인간, 이기적인 인간.
'그렇게 떠나버리면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나를 사랑하기나 한 거야??!!'
비난하는 만큼 엄마에 대한 시선이 차가워졌다. 나에게 엄마가 있었던가, 코웃음이 나왔다. 그리움, 슬픔, 미움과 함께 곁에 없는 엄마의 기억을 차례로 지워나갔다. 몇 안 되는 좋았던 기억들마저 사라지게 내버려 뒀다.
엄마를 배신한 아빠. 감히 그 여자를 우리에게 데리고 오다니.
'엄마와 우리에게 부끄럽지도 않았어??!!'
울분을 토해내며 원망 섞인 말들을 뱉어보지만 이상하게 아빠만큼은 마음대로 미워할 수가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나면 그 크기만큼의 미안함이 가득 차올라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말 없고 나서기 싫어하는 고지식한 부산사나이였던 과거의 아빠는 없었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던 그날부터 아니 엄마가 떠난 이후부터, 아빠는 두 딸을 책임지기 위해 기꺼이 노력해 왔었다. 동네시장에서 반찬값을 흥정하고 딸들을 위해 생리대의 브랜드를 꿰고 있었으며, 소풍날이면 옆구리 터진 김밥을 늘 말아주었다.
나를 위해 헌신한 대가로 아빠가 저지른 과거는 덮기로 했다. 생활 속에 배어있는 아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아빠를 용서해 갔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제일 중요했던 것은 아빠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