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편이 되지 못했다는 죄의식과 아빠를 배신하면 안 된다는 죄책감이 늘 뒤엉켜 있었다. 그런 나에게 자존감이나 자긍심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깨진 유리를 몸 어느 구석에 찔러 놓은 채 애써 괜찮은 척하며 지내는 가족들. 그 곁이 따듯할 리도 없었다. 그럴수록 나는 안정감과 보살핌을 찾아 친구나 연인에게 집착했다.
‘넌 뭘 좋아해?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또다시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다. 거부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나를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나의 질문과 시선은 늘 타인을 향했다. 한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그때의 나를 회상하며 말했다. 너 그때 꽤 바보 같았어.
그녀는 몰랐을 거다. 실실 웃어대며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나는 늘 머리로 계산하고 있었다는 걸.
‘얘는 이제 막 친해졌으니까 첫 번째 울타리를 열어주자. 걔랑은 밥도 몇 번 먹고 속 얘기도 나눴으니 네 번째 울타리를 열어줘도 되겠어.’
자존심을 세웠다고 우기고 싶지만, 실상은 불안에서 나오는 방어기제였다.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원하면서도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게 되면 떠나갈까 봐 불안했다. 누구든 떠나게 되면 우리 관계는 어차피 이 정도였기 때문에 타격은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털어내려는 계산이었다. 나는 모든 관계를 갈망하면서 두려워했다.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와의 성공확률보다 나를 좋아해 주는 남자와의 성공확률이 현저히 높았다. 나를 좋아 해주는 이들은 나에게 더 헌신적이었고 (그렇다고 믿었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인정의 말은 과했지만 친절했다. (그게 다 진심은 아니었지만.) 나를 돌봐주고 보호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이 차오르면 빠르게 만남을 이어 나갔다. 가족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유대감을 상대에게 기대했다. 관계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기며 의존적인 관계에 스스로 앞장섰다. 그런 내 모습은 매력적일 리가 없었다.
24살의 어느 날. 1년 반의 연애를 끝내자며 당시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가 나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네 시간은 너를 위해서 써.”
나를 위해? 나를 위한다는 게 뭐지? 그러고 보니 내 삶의 주체는 타인이었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늘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었다. 그가 내게 던져준 한마디에 내 마음속 도미노 하나가 톡, 쓰러졌다.
흔들림 없는 안정적인 관계가 그리웠다. 서로를 품어주는 그릇이 큰 사람을 만나 우리를 닮은 아이도 낳고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 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찰나, 우연히 읽게 된 책에 ‘자신을 사랑하세요.’라는 문장이 진하게 밑줄 그어져 있었다.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매달려 본 적은 있어도 나를 사랑하기 위해 애써본 적은 없었는데. 내 마음속 두 번째 도미노가 토독, 쓰러졌다.
도미노가 하나둘 쓰러질 때마다 타인을 향한 시선과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향했다. ‘난 뭘 좋아하지?’. 스스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낯선 질문에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두근거렸다. 먼저, 나를 위해 시간을 쓰기로 했다. 친구 아니면 화장실도 혼자 가지 않던 내가 혼자서 분식집에서 김밥을 시켜 먹고 혼자서 영화를 보고 오기도 했다. 혼자일 때 남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편안히 있던 발가락이 자꾸 오그라들었지만, 나만의 시간을 멈추고 싶진 않았다. 쭈뼛대던 손짓과 소심했던 발걸음이 당당하게 바뀌면서 나는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 정도면 준비가 다 됐겠지, 차오른 자신감으로 다시금 미래를 그렸다.
그 또한 쉽지 않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엄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투명한 유리창에 가로막힌 채 그 이상을 나아가지 못했다.
보고 배울 여성성도 신체상도 없던 내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엄마가 떠난 후, 아이에게 엄마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매일 같이 확인하며 살아왔는데. 생리를 시작할 때, 따돌림을 당할 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엄마가 있었다면 의지하고 싶던 순간들. 엄마라는 사람은 딸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까.
친구들과 술 한잔을 하던 어느 날. 취기가 오른 친구들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성인이 되었어도 친구들은 여전히 엄마와의 관계를 어려워했다. 평소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는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비꼬았을 텐데 그날은 좀 달랐다. 나에게 털어놓은 엄마와의 관계는 푸념이 아닌 고통스러워 내뱉는 하소연이었다. 부모가 둘 다 있어야만 행복할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구나. '엄마의 부재는 결핍이다'라는 나를 옭아매던 틀이 깨졌다. 토도독, 탁. 그것이 마지막 도미노였다.
엄마가 있으면 이렇게 해주었을 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주변에 딸에게 그렇게 해주는 엄마는 사실 많지 않았다. 엄마란 존재는 딸에게 사랑을 주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사랑받지 못했지만 상처받지도 않았다면, 엄마가 있는 아이들이나 엄마 없이 자란 나나 크게 다를 건 없지 않을까. 우리가 비슷한 선상에 있다면 나 또한 엄마 될 자격은 충분해 보였다. 엄마에게 받은 상처는 손에 꼽는 몇 가지뿐이고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엄마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며 내가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봤다. 따뜻한 말, 다정한 눈빛, 함께하는 시간. 스스로 묻고 답하며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갔다.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 그림이 그려질수록 사명감이 생겼다. 마음속 한 켠에 소중한 꿈을 품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