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언니와 타지에 있는 나를 대신해 간병인을 구해놓고 집으로 돌아온 지 3주째. 아빠의 금전적인 부분은 내가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은 간병비를 보내야 하는 날. 켜져 있는 노트북에 아빠의 공인인증서 USB를 꽂자 띠리링 소리와 함께 폴더가 떴다. 별 내용 없는 폴더에 눈길을 주지 않고 은행 홈페이지를 켰다. 탁탁, 길어지는 로딩시간에 무료해진 검지 손이 마우스를 눌러댔다. 화면에 보이는 USB의 폴더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뜻밖의 파일명에 시선이 꽂혔다.
사랑하는 딸에게.hwp (2015.02.14.)
아빠한테 편지를 받은 적이 없는데..? 물음표를 머금은 미간 때문인지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아무렇게나 자리했던 팔꿈치가 책상 위로 모여져 상체가 저절로 모니터로 쏠렸다.
2015년 2월 14일. 나의 결혼식 전 생일 즈음이다.
엄마가 살아 있었으면 시집간다고 대견하게 여기면서 많이 챙겨 주었을 건데, 우리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생일 밥상도 회사가 지방이어서 차려주지도 못하고 마음 한구석이 찡하다. (…)
네가 힘들 때마다 엄마가 옆에 있었으면 많은 위로가 되었을 텐데 아빠는 회사에 다니느라고 너희들을 신경 쓸 틈이 없었네. 돈이 없어서 좋은 집에서 지내지도 못하고, 중, 고등학교 다닐 때도 뒷바라지도 못하고 혼자서 견디느라고 고생 많았다. (…)
아빠 도움 없이 너의 힘으로 결혼한다니 대견스럽다. 너도 이젠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오손 도손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아빠와 같이 가족을 괴롭히는 인생을 살지는 말았으면 한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아빠의 진심을 한 줄씩 읽어갈 때마다 지난날 상처로 괴로워하던 내가 떠올랐다.
'엄마가 살아있었으면' 하는 대목에선 엄마를 떠나보내 매일 울던 아홉 살의 내가 나타났다. 어렸던 나에게 편지에 적힌 아빠가 나타나 나를 안아준다.
'많이 힘들었지.'
'중, 고등학교 다닐 때도' 하는 대목에선 잦은 전학과 애정 결핍으로 관계에서 겉돌던 청소년의 내가 나타났다. 사춘기 소녀에게 편지에 적힌 아빠가 또 한 번 나타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잘 자라줘서 고마워.'
아빠는 별로 해준 것도 없다며 나 혼자서 컸다고 자만했던 때가 있었다. 즐거웠던 추억도 손에 꼽고, 용돈을 넉넉히 준 것도 아니었으며, 사랑한다는 손길도 기억나지 않았다. 외롭고 힘들었던 과거를 견디고 이겨낸 건 오로지 내가 한 일. 그러니 부모였던 당신은 부족했고 형편없었으므로 내가 깎아내리고 비난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해 준 게 없으니까.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아이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일만 본다. 부모는 더 넓고 깊은 시야로 아이가 속한 세상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을 본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책임지기 위해 다양한 변수를 생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부모가 되어보니 알게 됐다. 그것이면 부모의 역할은 충분하다는 것을.
사랑한다, 로 끝나는 편지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지는 마라, 는 아빠의 마지막 문장이 나를 붙들었다. 잊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잘못에 얽매여 있는 아빠. 늘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아야 했을 인생. 나를 살게 한 건 최선을 다하는 당신의 모습이었다는 걸 당신이 알았더라면.
이 편지를 다 읽어 내려간 지금의 내가 답장을 보내듯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빠, 나를 끝까지 책임져줘서 고마워."
약물치료가 끝나고 재활병원으로 전원 하게 된 날. 내가 다시 아빠 곁을 지키게 되었다. 아이는 시어머님에게 맡기고 오전부터 필요한 일처리를 했다. 퇴원수속, 병원 간 이송, 입원수속, 새로운 간병사와 만남, 담당 간호사의 안내까지 받고 나니 아빠와 함께 할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코로나 시기인 만큼 외부인 통제가 심한 재활병원은 상주 보호자 외에 면회는 금지였다. 그 말은 곧 아빠가 입원하는 6개월 동안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얘기였다. 아빠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결혼할 때쯤 나한테 썼던 편지 기억나? 우연히 그 편지를 봤어.
읽는 내내 마음이 많이 아팠어... 전부 다 지난 일이야.
나는 아빠를 다 이해하고 용서했어. 지금 나 봐봐. 진짜 잘 컸지?
전부 아빠 덕분이잖아.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뿐이야. 아빠, 나 잘 키워줘서 정말, 정말 고마워.
아빠, 많이 사랑해."
"그래, 고마워."
조용히 웃는 아빠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졌다. 멋쩍은 듯 눈물을 닦아내고 얼른 가서 쉬라며 내 등을 떠민다.
아빠가 아프지 않았다면 그 편지가 내게 전해졌을까, 아빠의 진심이 나에게 닿기까지, 이 여정은 이렇게 길어야만 했을까. 이제야 삶이 내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 차례구나, 아빠가 나에게 준 사랑을 베풀 기회가 지금 주어졌구나.
병원을 빠져나오자 종일 몸에 붙어있던 긴장이 스르륵 발끝으로 흘러내렸다. 몸도 마음도 흐물거리고 허기가 졌다. 그제야 오늘 먹은 건 바나나 한 개가 전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병원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까지 겨우 걸어가 털썩 앉았다. 넓은 부지에 덩그러니 세워진 건물 뒤로 해가 저물어갔다. 짙은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아름다움에 넋을 놓다 아빠를 또 생각했다.
잠시 멀어지는 것뿐이야. 먼발치에서 아빠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할게. 희망을 잃지 마, 희망을 놓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