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사별자의 내면치유 애도일기 #10
기다림, 때가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 나에게 기다림이란 주로 설렘이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을 때의 궁금함, 출장에서 돌아온다는 남편의 소식엔 두근거림, 출산을 앞두고 아이를 기다리는 부푼 마음. 내가 알고 있는 기다림이란 고작 그뿐이었다. 이전과 다른 삶에서 겪는 고통과 희망의 줄다리기, 깊은 잠에 들기 전 사랑하는 존재를 기다리는 마음은 내가 여태 보지 못했던 기다림의 이면이었다.
네 살 아이의 여름방학을 맞아 아이와 나 단둘이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떠나는 당일 오전, 막바지에 챙기지 못한 물건들을 사러 아이와 쇼핑을 마쳤다. 여행가방에 짐을 챙겨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중에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 우는 아이가 된 목소리. 언니는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한 채 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산소 호흡기를 했는데도... 아빠가... 숨을 잘 못 쉬어... 빨리... 올라와..”
위급한 상황, 아빠에게 가야 했다. 예매했던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제일 빠른 기차표를 예매했다. 아이는 형님네 부탁하고 올라가는 내내 언니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경기도에 위치한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밤 9시쯤. 아빠 곁에서 고생했던 언니와 교대를 마치고 의료진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는 ‘폐렴으로 인한 쇼크’, 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우리가 약속한 희망은 신기루였을까. 희귀병 진단에도 몸을 태워버리는 신경통에도 아빠는 나름대로 마음을 다잡아가며 애썼다. 마음과 달리 상황은 쉽지 않았다. 면역체계가 무너진 몸은 항생제 내성균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격리 대상 환자로 지정, 재활치료의 중단, 재활의 골든타임은 허무하게 흘러만 갔다. 꼼짝없이 누워있어야만 하는 신세. 보건복지부 1등급 평가를 받은 무늬만 좋은 감옥에서 아빠의 절망이 시작됐다.
코로나 시국에 까다로운 면회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건 핸드폰뿐이었다. 아빠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두 번째 요양병원으로 옮긴 며칠 후부터 전화기를 꺼버렸다. 좋지 않은 예감에 사흘에 한 번씩 간호사실로 전화를 걸어 아빠의 안부를 물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누워있거나, 깨어있어도 눈을 감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간호사의 말. 회진도 처치도 귀찮아하고 가끔은 링거도 빼버리며 협조하지 않는다고. 친절했던 간호사도 자기들이 뭘 어쩌겠냐는 투로 대꾸했다. 일주일에 한 번 병원에서 걸어주는 영상통화를 할 때마다 시선을 피하고 대답도 잘하지 않았던 아빠의 얼굴이 뇌리에 스쳤다.
그즈음 소변줄이 빠져 처치를 위해 대학병원에 가야 했다. 가까이 사는 언니가 아빠를 모시고 갔다. 휠체어에 두 시간만 앉아 있어도 몸이 붓는 아빠인데, 서너 시간을 넘게 대기하자 열이 나기 시작했다. 코로나시기에 병원에서 열이 나는 환자는 비상환자일터. 보호자와 격리된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사하는 과정에서 치료 거부로 의료진과 실랑이가 있었다고 했다. 보호자인 언니를 찾아와 아빠를 묶어도 되냐고 물어볼 정도로.
그렇게 전해 듣기만 했다. 보라색인지 검은색인지 모를 피멍이 가득한 열 손가락. 아빠의 처참한 손은 그날의 상황이 심각했음을 짐작케 했다.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빠는 삶에서 버려졌다고 생각했을까, 아빠가 삶을 버린 건 아닐까, 서늘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의미 없는 질문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혈압과 맥박이 조금씩 떨어져 차가워지는 아빠의 몸에 담요를 감듯이 덮어줬다. 곁을 지켜야 하는 건 나뿐인데 아이를 챙기며 서둘러 온 탓에 자꾸 잠이 쏟아졌다. 아빠 곁에 바짝 붙어 팔과 다리를 주무르는 손의 속도가 느려지다 고개가 푹 떨어졌다. 당장 별일은 없겠지 싶어 엎드려 새우잠을 잤다. 앞으로 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니 체력이라도 비축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누군가 조용히 나를 깨웠다. 아빠의 상태를 이야기했던 의료진이었다. 응급실 병상에는 24시간 이상 있을 수 없다면서 병실을 옮겨야 한다고 했다. 오래 계시진 못할 것 같으니 24시간 더 있을 수 있는 응급병실을 내어준다고.
“아빠가 얼마나 더 계실 수 있나요?”
“... 오늘을 넘기진 못하실 것 같아요...”
더 이상의 가망은 없는 걸까요,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기대하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음을 안다. 연명치료를 거부했던 건 아빠였고 그 뜻에 따라 동의서에 서명한 건 우리 아닌가. 이들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라는 대답과 곤히 잠든 아빠의 곁을 지키는 것뿐.
세 시간 뒤, 의료진의 안내로 아빠를 응급실 2층 병실로 옮겼다. 나는 커튼 밖에서 대기하고 담당 간호사 두 명이 아빠 옷을 갈아입히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몸이 축축 처지기 시작한다는 간호사들의 수군거림이 커튼사이로 새어 나왔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기다린 지 30분쯤. 확인이 끝났다는 간호사가 나에게 묻는다. 아빠를 봐야 할 가족들이 더 있느냐고. 왜 그런 걸 묻지, 싶어 아빠를 바라봤다. 정면을 향하지 않는 아빠의 눈동자.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언니에게 연락했다.
아빠의 숨이 점점 불규칙하게 뛰었다. 하나, 둘에 쉴 때도 있고, 넷, 다섯에 쉴 때도 있었다. 내가 숨을 쉴 때마다 아빠의 심박수가 떨어졌다. 초침이 흐르듯 산소 포화도는 더 빠르게 추락했다. 안되는데. 언니가 아직 안 왔는데. 아빠 조금만 기다려줘.
삼십 분에 한 번씩 바뀌던 앞 자릿수가 오분 미만으로 훅훅 떨어졌다. 아빠의 상태를 나타내는 모니터가 깜빡였다. 제발 제발, 기도하는데. 병실 앞 엘리베이터에서 달려오는 언니와 예비형부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언니, 여기야. 빨리!!"
“아빠!! 나왔어. 아빠 딸 왔어! 안 돼... 가지 마. 아빠...”
언니 목소리를 들은 꺼져가는 심장이 조금씩 다시 뛰었다. 심박수도, 산소 포화도도 조금씩 올라갔다. 아빠는 떠나기 직전까지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는 아빠의 몸을 꼭 껴안고 그동안 전하지 못한 진심을 쏟아냈다. 그 사이 깜빡이며 요란한 소리를 내던 모니터가 일정한 음을 알렸다. 삐------.
언니의 작별 인사를 자장가 삼아 아빠의 숨이 조용하고 나른하게 멎었다.
‘나의 아빠가 되어줘서 고마워. 모든 시간이 감사했고, 행복했어. 우리 또 만나자. 잘 가.’
아빠는 투병 내내 힘들어했었다. 그 마음을 알았기에 아빠를 위로하고 진정시키는데 온 마음을 다 썼다. 그때의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 이상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빠가 진짜로 기다렸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뒤늦은 후회처럼 아빠의 간절했던 마음들을 떠올렸다.
완치될 거라는 전문가의 확답, 호전을 보이는 몸,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긍정적 신호들. 그리고 온기가 남아있는 집으로의 귀환,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에서의 해방. 어쩌면 이대로 모든 것이 멈추기를 바라는 끝.
혼란스럽고 절실했던 아빠의 기다림을 되짚어가다 우리가 마주했던 마지막 순간과 마지막 기다림을 곱씹어본다. 아빠는 우리를 기다렸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지키고 싶어 했던 존재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에 응답이라도 하듯, 우리는 마지막 순간이 돼서야 고백하지 못했던 진심을 털어놓았다. 뜨끈하고 묵직한 마음들을 왜 일상의 순간에서 나누지 못했을까. 놓치면 후회할 소중한 것들을 왜 잡지 않고 날아가게 두는 걸까.
영원한 이별이 남긴 가르침. 삶의 소중함을 돌보며 살아가라는 선물. 아빠의 죽음이 나에게 남긴 것을 마음에 새기며 생각보다 덤덤하게 아빠를 떠나보냈다. 앞으로도 이런 의연한 마음으로 당신을 떠올릴 거라 생각했다. 그 차분함을 뒤흔들어 놓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