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을 마친 날, 아이는 하루 종일 나를 찾았다. 언니를 제일 잘 따르기에 한시름 놓았는데 부모 없는 하룻밤이 처음이라 아주 불안했었나보다. 그 마음을 달래주려 평소보다 더 성실하게 아이와 눈을 맞췄다. 엉뚱한 일엔 더 많이 웃어주고 수시로 바뀌는 요구에도 바로바로 엉덩이를 뗐다.
그런 척일뿐이었다. 퇴원, 전원, 간병 등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라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아이가 잠시 눈 돌릴 때마다 처리해야 하는 일을 떠올리며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했을 때 된다면? 다음 선택지. 그렇게 했을 때 안 된다면? 다른 선택지. 한참 딴생각을 하는데, 이를 눈치챈 아이가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나에게 달려왔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표정으로 안아줘, 안아줘, 매달렸다.
본능에 충실한 아이가 부러웠다. 나야 말로 바닥에 드러누워 구르고 짜증내며 울고 싶은데. 아니, 이런 시기에 감정의 분출은 사치야. 고개를 젓는다. 막막함에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오지만 내 감정에 등을 돌렸다.
아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엄마가 떠난 뒤, 아빠만을 바라보는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남은 삶을 혼자 책임져야 했던 그 때. 두려움을 삼킨 채 희뿌연 길을 걸어가야 했을 그 때.
통증을 잡기 위한 마약성 진통제의 투여량이 줄어들자 아빠의 오락가락하던 정신이 차츰 돌아왔다. 정신이 들어올수록 선명해지는 현실 앞에 아빠는 주체성을 잃어갔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아빠에게 심각하지 않은 어떤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나의 2세 계획을 종알종알 전했다. 첫째는 딸이니, 둘째는 다른 성별인 아들을 낳고 싶다고.
"계집애고 머슴애고 너무 가리지마라. 다 똑같다. 느그 할머니, 할아버지가 너랑 언니랑 계집애라고 별로 안 좋아하셨지마는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참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성별이 무에 중요하노"
"그럼 그럼, 사실 상관없어. 아빠가 우리를 얼마나 잘 키웠어? 언니도 나도, 이렇게나 잘 자랐잖아!?"
"맞다, 내가 참 잘 키웠지....."
아빠는 생각에 잠긴 듯, 오른쪽 벽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잘 키웠다, 말하는 아빠의 말속에 은근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자랑스럽다는 듯 쓱 올라간 입꼬리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진 게 맞나 싶게 아빠는 순식간에 죄인의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