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날지도 모르고 아닐 수도 있고 뭐... 그렇지만 대피는 해야죠.
"나가야해, 물건 챙겨요"
"커피도요?"
"응, 모두 다요"
처음 출근했을 때 한동안 옆에 앉아 밀착 케어해 주었던 레슬리가 갑자기 나가자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Keep calm and Pack up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 옆사람과 이야기한다거나 그런 것도 없이 조용하고 일사분란하게 이동해 나가고 있었다. 모두들 별일 아니라는 듯 익숙하고 자연스러워보였다.
어디로 가야라는 건데?
나도 듣긴 들었다 그 소방알람. 하지만 우린 한번씩 에러나는 소방알람은 가뿐 무시하고 일을 하지 않던가. 레슬리가 챙겨준 건 거기까지였다. 다들 삼삼오오 혹은 개별적으로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자율적으로 근무지를 이탈해본적 없는 한국인은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로 가도 되는 허락범위인지 몰라서 어색하게 구청 앞마당에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휙하니 가버린 레슬리도 어디로 가야하냐고 물으니 딱히 대답을 안해준 리사도 원망스러웠다. 낙동강 오리알...
언제까지 돌아와야하는건데?
그런 건 모른다고 했다. 그런 걸 개의치도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근무 장소의 자유가 있는 곳이니 랩탑을 펼쳐놓기만 한다면야 어디서 일하든 자유로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뿐이였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언제 들어왔다고 누가 뭐라할 사람 하나 없는 그런 곳이었을 거다.
누군가는 길드홀2의 빈 회의실로 가기도 하는 것 같고, 누군가는 그냥 구청 잔디밭 벤치에 앉았고, 누군가는 킹스턴 마켓 광장 벤치, 또 누군가는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참 날씨가 찬란한 날이었다.
우리나라는 왜 대피라는 당연한 것을 가뿐 무시하며 살아가는 걸까 생각해보게 되었던 날이었다.
p.s. 19년 11월에 또 한번 알람이 울렸고 그땐 스르륵 사무실을 미끄러져나와 좋아하던 코스타에 1등으로 자리를 잡고 랩탑을 폈다. 적응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