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격돌! 살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영국(1)
페이스북이 1년 전 썼던 글을 알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영국에서 유학을 하든, 직장을 다니든, 소모임에 참석을 하든, 전업맘이라도 학부모 회의에 참석할 수도 있으니, 누구나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가만히 있을 용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학교에서나 직장 회의에서나 한국에서는 조용히 있는 것이 이상할 것 없지만 영국에서는 말을 하지 않으려면 크나큰 도전이 필요하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 '저 말하지 않는 자를 소외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을 우리는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해', '저 사람을 이 장에 어떻게든 끼워야 해', '어떤 말이라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말하지 않는 동양인 한 명 때문에 모두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더랬다. 한 번은 새로운 미팅을 할 때였는데, 그 말하지 않는 이방인을 불편해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팀 동료가 나서서 나를 대변하여 입장을 설명해준 일도 있었다. 말하지 않는 이방인의 존재는 그 방 안에서 귀신보다 무서웠다.
좀 조용히 있는 나를 편안해해 주면 좋겠건만, '난 지금 배우는 중이라고!', '난 지금 분위기 파악 중이라고!',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대체 뭘 말하라는 거야?!', '제발 나에게 말 걸지 좀 마.', '다음 기회에 생각을 정리해서 올게, 지금은 노노.' 겉으로 말은 안 하지만 이런 속사정을 소리 없이 샤우팅하고 있는 나를, 그들은 조금도 가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똑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혹은 맥락에 맞을지 안 맞을지도 모르는 말을 멍텅구리처럼 지껄일 수는 없었다. 그게 한국인의 부끄럼이자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것보다 더 멍텅구리 같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앉아있는 자는 동지가 아니라 스파이 같은 존재라는 것을.
그들도 '차라리 오지를 말지'싶었을 것 같다. 다른 이민족들은 오지도 않는 행사에 꾸역꾸역 빠지지도 않고 와서는 무언 폭력을 수행하는 그 동양인은 목에 낀 가시 같았을 것이다. 그 동양인 또한 매번 고문이었고 그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매번 낯선자임을 증빙이라도 하려는 듯 그곳에 갔고, 불편하게 그들을 이해하는 뜨거운 용접을 포기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러저러해서 (나는 지금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여러분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반복되는 미팅에서 계속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교육을 가도 꼭 워크샵이 있고, 중간에 네트워킹하는 시간도 있다. 한번은 수업 전체가 런던의 대중교통 외 자동차 사용을 2030년까지 제로로 만드는 워크샵이어서, "나는 영국에 도착한 지 몇달이 되지 않아, 런던의 교통 등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 지금은 당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선언하고 구경만 한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친절한 팀원들은 마지막에 나에게 말을 거는 걸 참지 못했었다.
어딜가나 그 말해야하는 문화때문에 목메달고 싶었던 그 동양인의 결말은 어떠했느냐고? 몸담았던 직장은 회의자료도 사전에 주지 않는 미팅 문화여서 처음에는 미팅의 패턴을 미리 파악할 수 없었기에 대처도 어려웠지만, 차차 나쁘지 않은 시점에 던질 이야기를 준비해 들어가 이야기를 하고 나면 밝아진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해커톤에 참석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라운드 테이블에, 겁없이(?)라면 거짓말이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쳐들어가 이야기를 했다고도 한다.
그들도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은 알게 되었고, 나중에 새로 바뀐 상사에게는 "아무말이나 하는 영국인들보다, (당신이 아껴서 하는 말과 아이디어가) 훨씬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서양이나, 영국, 선진국에 대한 환상은 절대 금물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그들은 바보같은 소리를 해도 받아주고 소중하게 여겨주는 포용을 가진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속으로 더 냉정한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모자라도 받아주기에 모자란 채로 살아가는 것에도 익숙할 수 있고, 우리나라처럼 모두가 평균 이상으로 똑똑하게 살아가지도 않고 그만큼 사회 일반의 발전도 더딜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절대 기준으로 사람의 능력을 끌어올리느냐, 다양성과 개인의 능력과 한계를 인정하느냐'가 그 사회 인력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런던 중등 교사 루시 크레헌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나라'에서도 언급된다. 모든 것은 역사와 사회적 배경을 보며 이야기해야한다. 현상만 따오고 그 부작용에 대한 검증없이 적용을 하기에 외국에서 들여온 제도가 늘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어그적거리는 것을 여기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다른 편에서 자세히 다뤄볼 예정이다.
이제 1년 전 영국에 있던 내가 썼던 일기를 같이 엿보아 볼까. 그리고 지금 영국에 계시거나 영국에 가시려는 분들에게는 그냥 어디든 겁 없이 참석하고 바보여도 좋으니 아무 이야기라도 지껄이시라고 이야기해 드리고 싶다. 지껄이는 만큼 얻을지니!
2019년 10월 15일
가만히 있을 용기.
여기 처음 와서 정착하는 분과 요즘 가까이 지내다 보니 아이 생일파티부터 학교 모임까지 다양한 모임 공포증 등 새삼 영국 적응 초년생의 마음을 다시 접하니, 잊고 싶은 적응의 흑역사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내가 참, 그 이해도와 그 영어로, 런던 시내 Google 사옥 미팅까지 따라가서 “가.만.히.있.을 용기”를 시전한 것이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1년 전쯤이었으려나. 아마 그들은 회의 내내 나의 정체가 궁금했을 것이다. 회의 끝나고 명함 주며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며 당신네 회사 하는 일에 관심 있다며 나서는 걸 보니 마침내 벙어리가 아니라는 건 알았겠지.
영국에서는 어떤 모임도 가만있는 사람보다 가만있는 사람을 지켜보는 이들이 더 괴로워 보인달까. 어떻게든 무슨 말이든 시켜서 참여토록 한다는 걸 늘 느꼈던 거 같다. 말하는 사람이 특별히 나대는 사람인 한국 문화와는 참 딴판으로, 조용히 있는 사람은 이물질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사소한 의견도 웃으며 듣고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부끄럽지 않아 보인다. 말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부끄럽다.
그렇게 꿋꿋이 (그들 기준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고 1년을 넘게 지냈던 것 같다.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을 하지, 실정에 안 맞는 소리 해서 바보 되기 싫은데’하는 한국인의 자존심이 입에 지퍼를 달게 했다. 몰라도 지껄이는 이들과 달리..
배석한 입장이라 발언권이 없는 회의에서도, 속 터지면 입이 터지는 사람이니, 한국인 중에서는 할 말을 하는 타입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몰라도 지껄여야 한다는 그게 참 어렵더구먼~
1년쯤 됐을 때, 클로이랑 같이 갔던 미팅에서 바보짓을 실컷하고는 그녀에게 그랬다. “I should have been silly earlier.” 더 일찍 바보라는 걸 인정하고 나를 내려놓았더라면 더 많은 발전이 있었을 텐데.
가는 날까지 어려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