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이해 사이
영국에서의 운전은 행복했다.
타국 생활이 외로웠던 날엔
행복해지고 싶어서 운전을 했다.
커다란 두려움과 긴장감을 안고 시작했던 영국 운전은, 태어나 경험해보지 못한 큰 위안을 주었다. 모르는 길을 가도, 실수를 해도 크게 비난받거나 질타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저 조금 헤매면 된다는 것을, 아주 금방 알게 되었다.
초보운전이라고 P를 붙이면 더 많이 이해받고 양보받았다. 깜빡이만 켜면 차선을 바꿀 수 있었다. 버스는 교통의 수호자였다. 차선을 급하게 바꿔야해서 난감해 할 때 덩치큰 빨간 버스에서 손이 톡 튀어나와 먼저 가라는 표시를 해준다. 덩치 큰 착한 친구 같았던 영국 버스.
영국에서의 운전은
잘해야만 혼나지 않던 한국 어린이가
못해도 괜찮다는 말을 듣는 기분이었다.
영국에서의 운전은 기계를 모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매 상황에서 상대 운전자와 주고받은 눈빛, 손짓은 대화였고, 마음을 전달받았다. 보통은 배려와 양보라 느꼈다. 운전이 익숙해지고 여유가 생겨 반대로 그 친절을 상대에게 줄 수 있었던 날엔, 심부름하고 어른이 된 듯 웃쭐해진 아이처럼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된 것 같았다. 베푼 친절 뒤엔, 늘 잔돈처럼 따라오는 상대의 활짝 웃는 얼굴과 감사 인사가 집으로 운전해 돌아가는 내 마음에 넉넉한 노잣돈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영국 사람들이 신사이기만 해서
양보를 잘하는 것일까?
누구나 영국에서 처음 운전을 할 때면 양보들을 너무 잘해서 “와~ 이런 게 선진국인가?, 선진 문화인가?!” 찬사를 하게 된다. 그 찬사가 참을 수 없이 목구멍으로 기어올라오지만, ‘뭐든 제대로 알게 될 때까지는 판단 보류’하자는 결심이 있었기에 찬사가 반복되어 찬양이 되려는 것을 꾹꾹 눌렀었다.
양보하지 않으면 너도 나도 못 갈 열악한 도로 환경이 양보를 만들어 냈다는 걸 운전이 쌓여갈수록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양보가 아니라 양해였다.
도로 양쪽에 노상주차나 개구리 주차를 합법적인 주차라인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이름만 양방향 1차선이지 실질적으로는 일방통행에 가까운 게 도로 실정이었다. 몇 백 년 된 건물이니 -테라스드 하우스(Terraced House)는 시골에서 런던으로 몰려온 산업 노동자들을 위한 집이었으니 최소 산업혁명 시대인 것이다- 주차공간을 마련해서 지었을 리가 없고, 마차나 지나다닐 정도의 도로였다.
차량이 많지 않은 킹스턴도 출근과 등교 시간에는 그 좁디좁은 도로로 차가 다 쏟아져 나와 불통이 된다. 지각하겠다 싶은 마음으로 라운드 어바웃에 멈춰 서서는, 길 건너 차량이 빠지기만을 기대하며 뚫어져라 차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운 움직임이 포착된다.
분명 앞에 차가 빠졌는데도 꼬리 물기는커녕, 빈자리가 생겼는데도 라운드 어바웃을 건너지 않고 맞은편 차가 오도록 기다리고 있다. 두 세대 빠지고 나면, 바로 뒤차는 주차 공간 사이 틈으로 들어가 반대편 차량이 갈 수 있도록 양보를 한다. 만약, 그 마지막 차가 멈춰 서지 않고 앞차에 꼬릴 물었다면 반대편 차가 빠지지 못했을 것이고, 뒤차가 실정을 모르고 따라 들어오게 되면 양방향 차량 모두 꼼짝도 못 하고 발이 묶이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영국의 열악한 도로 환경이
영국의 교통사고율을 낮춘 걸까?
그래서 영국 사람들은 전방위적으로 교통 사정을 살피며 운전하지 않을 수가 없고 파악이 안 되더라도 무리하게 욕심내어 빨리 가려하지 않아야 순리대로 나도 갈 수 있는 상황이 온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영국은 OECD 국가 중 초저의 교통사고율을 자랑한다.
열악한 도로 사정 위의 동지애
때때로 마주 오던 두 차량이 순간적으로 서로 망설이며 양보를 하고 있는 상황이 심심찮게 생긴다. 그럴 때면 한쪽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반짝이며 여기 공간이 있으니 네가 먼저 오라는 신호를 해준다. 상대방 차량은 고맙다고 헤드라이트를 두 번 반짝이며 (상대에 대한 예의로) 쏜살같이 달려가 빠져나가 준다.
그렇게 도로 위의 운전자들은 열악한 도로사정을 함께 해결해나가는 동지가 된다. 이미 양해에 대한 답례로 하이빔을 두번 쏘았지만, 가까워지면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인사하는 것이 영국인들의 마음이자 매너이다.
영국이 살만하다면, 그건 부자나라라서, 개인이 부자라서가 아니다. 서민 개개인은 오히려 한국보다 소박하고 가난한 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거리거리에서 만나는 그런 사소한 행동들로 마음 각박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살만한 이유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모습은 그다지 흔하지 않기에 서양인들도 영국인들을 젠틀하다고 하나보다. 그래서 영국에서 유럽으로 해외여행을 하고 히드로 공항에 들어서면 긴장감이 풀리고 이제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매너로 행동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안전지대였기에 마음이 보들보들 노곤노곤해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