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락재 Oct 24. 2021

놓지 못하는 것들

수술 후 6개월, 월리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체중이 20kg 이상 늘어나 110kg의 거구가 된 것이지요. 느린 걸음으로 10m만 걸어도 숨이 가빴습니다. 매일 복용하던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이란 걸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뇌하수체를 절제한 탓에, 스테로이드를 복용하지 않으면 스트레스 상황에서 급사할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지요.


달라진 것은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월리는 비행기나 엘리베이터에서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불안장애였지요. 그와 동시에 대인기피증마저 찾아왔습니다. 현대카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저 이외 다른 사람을 만나면 식은 땀이 흐르고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버렸지요. 그리고 그런 일들이 거듭될수록 자기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라고 토로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지난 날들에 대한 미련이었습니다. 월리는 전속력으로 달리던 자동차에서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초고속 자동차를 타고 질주하는 예전 동료들을 만나면, 승진 자랑에 여념 없는 그들 사이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말없이 있다가 돌아오곤 했지요. 전처럼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쉬이 놓아지지 않아서, 월리는 자신의 처지를 많이 서글퍼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나갔던 월리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벌써 며칠째 유치원 꼬마들과 마주쳤다며, 매일 대낮에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자신을 유치원 선생님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겠느냐고 말하더군요. 그 뒤로 월리는 되도록 낮에는 외출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 40대 초반의 남성이 직업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그를 작아지게 만드는지 알게 되었지요.

더이상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도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성치않은 몸에도 복직을 고집했던 것 역시 모든 비용을 제게 부담케 하는 것이 미안해서였지요. 지금은 회복에 전념해야 할 시기이고, 돈은 건강해지면 언제든 벌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주어도 그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성공에 대한 미련, 타인의 시선, 그리고 경제적 부담감. 아직 놓지 못해서 월리를 괴롭히던 것들의 목록입니다.

법륜스님 말씀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지요. 손에 든 찻잔이 뜨거우면 그냥 놓으면 된다고, 그런데 사람들은 뜨겁다고 괴로워하면서 잔을 놓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법륜스님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움켜쥐는 법만 배우며 살아온 우리가 어떻게 놓는 법을 알겠느냐고. 강박적으로 성취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나고 자란 우리가 내려놓는 걸 연습이나 해봤겠느냐고 말이지요.

월리는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 성토했습니다. 답답하기는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우리가 노새처럼 많은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과 내려놓아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리고 우리 아닌 누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통찰력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insight는 사실 내관(in-sight), 즉 안을 들여다본다는 의미라지요. 우리 안에 해답이 있다는 뜻일 겁니다. 다만, 바깥만 보며 살아온 우리가 그 답을 알아채기까지는 우직한 다짐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고민 끝에 우리는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차분하고 묵직한 월리는 좌선 명상을, 생각이 많고 에고가 강한 저는 몸을 움직이고 나를 낮추는 절수행을 선택했지요.

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지, 우리를 얽어매는 것들로부터 멀어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질병과 장애가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지. 질문은 끝이 없고, 집중은 말처럼 쉽지않았습니다. 진척이 없어 화가 치미는 날들이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명쾌한 답을 얻어 해사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날도 간혹 있었지요.

그렇게 조금씩 월리가 변해갑니다. 당장 건강해져서 사회로 복귀하고 싶던 조급함을 내려놓고, 지금을 찬찬히 음미하며 자신에게 충분한 시간을 내어주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피하지 않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 안의 답을 찾게 되겠지요. 그렇게 우리가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봅니다.

이전 03화 우리가 함께인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