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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락재 Oct 24. 2021

우리가 함께인 이유

어느새 결혼식이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혹시나 하는 미련으로 차일피일 미뤄두었던 예식장 취소를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무 것도 모르고 결혼식만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께도 이제는 사실대로 말씀드려야했지요.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부모님댁까지 내려갔는지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어렵게 입을 떼고 있었고, 두 분은 참담한 소식에 아무 말씀도 없었지요.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가 괴로워 도망치듯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새벽에 요란한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엄마가 울면서 접시를 깨트리고 있더라고 말입니다. 엄마는 남들처럼 순탄히 결혼하지 못하고 고생하는 저를 참 많이도 애처로워했습니다. 행여 마음 여린 월리가 알면 슬퍼할까봐 한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려깊은 그가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겠지요. 월리는 늘 우리 부모님과 저에게 미안해했고, 저는 아무 잘못도 없이 죄스러워하는 그가 가여웠습니다. 어느 날, 월리는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나는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가요. 이번 생에는 안되지만, 다음 생에는 우리 꼭 일찍 만나서 오래 같이 살아요" 그런 그에게 저는 대답했습니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니냐구요. 그러자 그는 말없이 웃었지요.


애끓는 엄마를 생각하면 저라고 고민이 없었을까요. 하지만 어디에 가도 이 사람보다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존경할 수 있는 배우자를 꿈꾸던 제게, 월리는 평생 존경하며 살 수 있겠다는 믿음을 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진중하고 사려깊은 태도와 한없이 다정하고 여린 속내를 가진 사람이었지요. 월리 아닌 누굴 만나더라도 살면서 모진 불행 하나쯤은 마주칠 텐데, 존경하는 마음 없이는 그 시간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닫고, 내 마음 하나만 보고 가기로 마음 먹었지요. 저는 마더 테레사가 아니었지만, 월리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7월초 월리는 퇴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우리는 눈 치료를 위해 전국을 누볐습니다. 주중에는 아주버님의 도움으로 30km 거리의 병원을 다니고, 주말에는 저와 함께 부산에 내려가 눈 치료를 받았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강행군이었지요. 하지만 감사하게도 오랜 노력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고, 어느덧 월리는 큰 간판글씨를 더듬더듬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뭔가를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지요. 그리고 다시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분식집에서 메뉴판을 앞에 두고 한참 인상을 쓰던 월리가 “......오...징...어...튀김, ......고...추...튀김” 하고 읽기 시작했을 때, 저는 목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영영 앞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그가 손톱보다 작은 글자까지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꿈만 같았지요. 그 고된 시간을 묵묵히 이겨내준 월리가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오른쪽 눈이 조금씩 좋아지자, 월리는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했습니다. 늘 바쁘게만 살았는데, 갑자기 넘쳐나는 시간이 익숙치 않았겠지요.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것은 캘리그래피였습니다. 한쪽 눈으로 글을 쓰다보니 삐뚤삐뚤하고 필체도 엉망이라며, 한 때 명필로 불린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다나요. 그렇게 수업을 시작하면서 월리는 모처럼 호기심과 활력을 되찾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몇 주 뒤, 그는 쑥쓰러운 표정으로 이 글귀를 보여주었지요.

제 눈에 비친 세상은 늘 조금은 불합리하고 이기적인 곳이었습니다. 특히 월리가 아픈 후부터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여겼지요. 그런데 정작 월리는 한 눈으로 보는 더 큰 세상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제가 미처 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었는데, 제가 잠시 잊고 있었나 봅니다. 두 눈을 환히 뜨고도 감은 듯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을 보지 못해도 마음의 눈을 환히 뜨고 사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 날, 눈 밝은 월리에게 배운 부끄러움은 제 안에 오래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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