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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락재 Oct 24. 2021

내가 뭐 어때서

즐겨 보던 TV 프로그램에서 개그우먼 박지선씨의 인터뷰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유쾌했던 기억이  가시기도 전에 그녀의 부고가 들려왔지요. 말간 웃음 뒤로 아무도 모르는 아픔을 감추고 있었구나 싶어서 오래도록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못하고 속으로 앓기만 하던 월리의 지난 날이 생각나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2012년, 월리의 불행은 이직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새 상사는 시도 때도 없이 인격모독과 언어폭력을 남발하며 직원들을 괴롭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중에는 퇴근을 못하게 막고 주말에는 출근을 강요하는 탓에, 매일 아침 6시에 집을 나서서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오는 생활이 2년간 계속되었지요. 뉴스기사에서나 보던 직장 내 갑질과 괴롭힘이었습니다. 사내 감사실에 고발한 이들도 여럿이었으나 번번이 묵살당했고, 월리는 그 끔찍한 상황을 미련하지만치 묵묵히 견딜 뿐이었습니다.


상사의 막말과 주먹질을 떠올리며, 월리는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몸서리쳤습니다. 그러나 월리의 말 끝에는 그런 인면수심의 인간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못했던, 무력했던 자신을 향한 원망도 묻어났습니다. 고통받던 자신을 보살피지 못했다는 자책이겠지요. 그렇게 2년간 괴로움과 비참함, 미움과 자책을 견디는 동안, 월리의 몸과 마음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지고 말았습니다. 뇌종양의 본질은 월리의 병든 생각과 마음이라던 명상 선생님의 말처럼 말이지요.


우리 엄마의 삶도 월리만큼이나 애처로웠습니다. 멋진 문학도이자 등단 시인이었던 여인은 결혼 후 아내와 엄마로 사느라 자신의 이름을 내려놓았습니다. 반짝이던 청춘과 재능은 어느새 아득한 옛일이 되었지요. 남편과 아이들은 그녀의 헌신과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누구 하나 그녀를 귀히 대해주지 않았습니다. 마음 한구석이 늘 서글펐지만, 딸이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아들이 한의대에 입학했을 때 그녀는 지난 세월을 다 보상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지요. 아들은 학교 공부를 따라가지 못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 사고마저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의 불화도, 아들의 일탈 행동도 걷잡을 수 없었지요. 그러기를 무려 8년이었습니다.


웃음많고 반짝반짝 빛나던 여인은 30년 세월을 지나는 동안 스스로를 볼품없고, 돈 한 푼 벌 줄 모르는 무능한 존재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몇 천원짜리 화장품 하나도 사지 못했지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 엄마는 모든 사랑을 자식들에게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절망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느낀 참담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까요. 엄마의 일기장에는 그 모든 감정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습니다. 고단한 삶에 대한 자기 연민과 혐오. 끝간 데 없이 비뚤어지는 아들에 대한 원망.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자책과 무력감까지. 그 해묵은 괴로움이 결국 암이 될 때까지 엄마는 자신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제 이야기를 고백할 차례겠지요. 저는 제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못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동생을 끔찍히 사랑하는 엄마를 보면서, 늘 상대적인 애정 결핍을 느꼈지요. 그래서 뭐든 알아서 하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예민한 딸보다 무던한 아들에게 더 마음이 간다'던 말을 들은 어느 날부터는 제 성격이 싫어졌습니다.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면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 같았지요. 그래서 어른이 된 후에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강박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긴 터널 앞에 서있던 우리 세 사람은 우리 스스로를 아껴주지 못했습니다. 무능하고 미성숙한, 결점투성이의 나를 사랑할 방법을 알지 못했지요. 그래서 남들보다 자신에게 더 모질었고, 자신을 평가하고 자책하기 바빴습니다. 견디기 버거운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스스로를 행복해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시커멓게 썩은 마음이 목숨을 옥죄는 병이 될 때까지 한번도 자신을 보듬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지요.


그런데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완전함이란 옳고 그름, 추함과 아름다움, 비천함과 신성함, 그 모든 것이라는. 그 글을 읽고 처음으로 내 존재가 온전하게 느껴졌습니다. 내 안에 있는 어리석음과 미숙함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기뻤지요. 그리고 더는 나를 평가하고 심판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홀가분해졌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에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습니다. 슬픔이나 분노를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억누르지도, 억지 긍정을 강요하고 싶지도 않아졌습니다. 내 안에서 생겨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어주고 싶어졌지요. 그리고 그 느낌들이 자연스레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고 싶어졌습니다. 한번도 저 자신에게 그런 시간을 주지 못했으니까요.


지금도 인생이 버겁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내 자신이 보잘 것 없는 듯한 느낌이 불쑥 고개를 들이밉니다. 그러나 더는 억지로 긍정 요정이 되려 나를 괴롭히지 않고, 내 감정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어느덧 내 마음이 평안을 되찾으면 나는 다시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고, 버거웠던 상황이 스르르 풀리기도 하지요. 몸이 마음을 반영하듯, 외부 환경에도 내 마음이 투영되기 때문일 겁니다. 내가 나를 온전히 바라봐야 내 세상도 온전해진다는 것을 이렇게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겠지요.


몇 해 전, 어느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강연자는 열 명 남짓의 참석자들에게 "내가 뭐 어때서!" 하고 크게 소리쳐 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입을 채 떼기도 전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그리고는 목에 무언가 걸린 것만 같아서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지요. 이제는 저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해주려 합니다. 강함과 약함, 깊음과 얕음, 지혜와 어리석음을 모두 품고 있는 나를 온전히 사랑하다 보면, 언젠가는 허한 마음이 따뜻하게 채워질 것을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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