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고생의 사는 사람, 고생하는 사람
초보 주부 6개월차, 지난겨울 마트에서 충격적인 물가를 마주하게 된다. 오이가 한 개 천 원? 분명 내 기억 속 오이는 다섯 개에 천 원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물가가 높아졌지 궁금했다. 그다음 주에도, 다다음주에도 오이 가격은 그대로였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직접 한번 길러보기로 결심했다. 그땐 몰랐다. 겨울이라 채소가 비쌌다는 걸, 직접 기르면 더 비싸다는 걸.
한 번 마음먹으면 당장 시작해야 하는 내겐 그 해 겨울이 유달리 길었다. 지자체에서 하는 주말 농장은 빠르면 2월, 보통 3월이 지나서 신청을 받았다. "나 원참, 이렇게 느려서 언제 씨 뿌리고, 물 주고, 따먹겠어?" 답답한 마음에 개인이 하는 농장을 찾아 연락을 돌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4월 지나서 날 풀리면 연락 주세요." 가장 빨리 여는 곳과 계약하려 했지만, 모두 굼떴다. 그땐 몰랐다. 봄, 여름, 가을 열심히 일한 농부도, 땅도 겨울에 비로소 쉰다는 사실을. 그 에너지로 이듬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려 작정한 사람 같았다. 모종(옮겨심기 위해 가꾼 어린 식물, 보통 시장이나 화원에서 삼)과 파종(씨앗을 뿌려 심는 것)의 뜻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다. 인터넷으로 모종판과 상추, 시금치, 당근 등 씨앗을 샀다. 그까짓 것 직접 길러보지 뭐 싶은 마음에. 옮겨심으면 비뚜로 나고, 적응을 잘 못한다는 시금치와 당근도 모종판에 예쁘게 길렀다. (나중엔 다 초록별로 보냈지만,,)
직접 기르니 시간은 빨리 갔다. 우리 집은 춥지만 볕은 잘 들어왔고, 씨앗에서 싹이 나고 길쭉길쭉 뻗어 났다. 그리고 마침내 4월 집에서 잘 키운 모종판과, 시댁에서 얻어온 커다란 곡괭이, 삽, 쇠스랑을 들고 가장 빨리 개장하는 곳에 계약하러 갔다. 4월부터 11월까지, 10만 원을 내고 다섯 평 땅의 자발적 소작농이 된 것이다. 땅 주인은 나의 모종판을 보더니 "직접 키우신 거예요? ㅎㅎ" 라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기특해서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구별할 순 없었지만. 이윽고 "아직 땅에 심으면 안 될 텐데,, 4월이라도 영상 10도 이하로 떨어지면 냉해 입어요~"라고 했다.
농사는 부지런하면 장땡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주인님이 안된다니 어쩔 수 없었다.
봄 농사에 부지런 떨면, 가을 농사에 게으름 피우면 망한다는 말에 지지 않으려면 따를 수밖에.
빨리빨리가 미덕인 도시에서 자랐다. 이웃보다 먼저, 많이, 잘 키우는 게 목표는 아니었지만 내심 밭에 처음 온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몰래 뿌듯해했다. 땅 주인이, 모종집 사장님조차 말리니 일단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동안 거의 대부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입시도, 취업도, 퇴사도, 결혼도 모두. 하지만 자연 앞에서는 일단 겸손해져 보기로 했다. 자연은 힘이 세니 한낱 미물인 나는 그 흐름에 따를 수밖에. 못 참겠다며 빨리 심고 싶지만, 애써 키운 모종만 버리고 싶진 않았다. 처음부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텃밭이라며 투덜대기엔, 맘대로 되지 않아 더 재밌어하고 있는 묘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