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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집가 Aug 20. 2024

[가지] 모태솔로 남자와 결혼하면 생기는 일


듬직하고 능수능란한 남자를 좋아했던 나는 어쩐지 결혼은 모태솔로(를 주장하고 있는) 남자와 하게 됐다.


요즘 유행하는 엄태구 씨처럼, 숫기도 없고 당황하면 금세 얼굴에 나타나는 그는 회사 선배의 소개팅으로 알게 됐다. 호감 가는 얼굴과 바른 청년 같은 맛은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재미는 없어 두 번 정도 만나고 흐지부지됐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의 실수(?)로 다시 연락이 되어 만났고 다시 만났을 땐 그 서투름이, 진지함이 좋아 보였다. 남자가 귀여워 보이면 끝이라던 말은 정말이었고 나도 모르게 세 살 많은 오빠를 리드하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연애할 땐 거리 때문에 주말에만 만날 수 있던 우리는 한강과 강천섬을, 강원도와 제주도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래서 몰랐다. 그의 집돌이 잠재력을.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으면 금요일 퇴근 후 집에 와서 월요일 출근 전까지 안방과 거실에서만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반찬과 문 앞까지 새벽에 배송해 주는 시스템 덕분에 어찌어찌 밥은 해 먹지만 뭔가 이대로 두면 재미와 짜릿함이 사라질 건 뻔했다.


주말마다 카페나 맛집을 찾는 것도 귀찮고, 여행을 다니기에도 부담스러울 무렵 텃밭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가 취미를 공유하면 대화도 늘 거고, 집에만 있진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밭에서 나오는 작물은 덤이고.


텃밭일도 왠지 내가 다 할 것 같다는 기분을 애써 외면하며 호기롭게 땅을 분양받아 시작했다. 나는 시작할 때 의욕이 앞서는 사람이라 온갖 알고리즘이 밭으로 뒤덮였다. 4월에 심으면 좋을 것들, 지지대 세우는 법, 비닐 멀칭 하는 법, 물 주는 주기나 농약 없이 키우는 것과 관련된 영상을 끝없이 보았다. 주말이면 다섯 평의 잔다르크가 되어 남편에게 여기 잡초 뽑아달라, 저기에 지지대 세워달라, 모종 사러 시장가자 등등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군말 없이 따르는 남편의 고마움은 모르고 왜 시키는 대로만 할까라는 불만이 고개를 들었다.


밭에서 따온 것들을 집에 가져와서 씻고, 말리고, 요리하는 온갖 과정에서 노동 착취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같이 하고 있고,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 소리 내 말하진 않았지만 불만은 켜켜이 쌓였다. 그리고 그 불만은 이상한 곳에서 터졌다. 유달리 잔병치레가 많고, 약이나 병원은 싫어하는 남편. 그러니 콜록콜록 거리는 소리를 듣고, 컨디션이 회복되기를 바라며 누워만 있는 몸을 봐야 했던 나는 아픈 사람에게 위로는 못할 망정 짜증을 냈다. 언제까지 아플 거냐며, 결혼 후 육 개월 중에 사 개월을 비실거렸던걸 아냐며. 그 말을 할 때의 난 이미 내가 받은 간병과 간호는 까맣게 잊었다.


아픈 상태에서 같이 짜증 낼 법 한데 순한 남편은 고맙게도 인정하고 빨리 나으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아픈 티를 안 냈을 수도 있고) 이래서 이 남자를 좋아했지 싶었다. 싸움이 유난히 많은 연애를 했던 나는, 몇 년을 만나도 성질 한 번 안내는 남편이 신기했고 그게 좋아서 결혼까지 했다. 쉽게 짜증 내는 나와는 달리 화를 모르는 초인 같던 사람. 오죽하면 “오빠는 짜증이 안나 봐서 어떤 게 짜증 나는 건지 모르는 것 같아. 와이프를 짜증 나게 하는 101가지 방법으로 책을 써봐”라고 했다.


아끼는 그릇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깨버리는, 움직이는 곳마다 이미 쓴 휴지를 두고 다니는, 물티슈로 식탁을 닦는(나무 식탁이라 안 돼요...), 답답할 정도로 느린 내 남편.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릇에 팝콘을 담아주려는 마음을, 환경보호를 위해 두세 번 휴지를 재활용하려는 따뜻함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대답을 하는 다정함을 알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어릴 땐 가지가 물컹해서 싫었다. 잘 자란다는 말만 듣고 키웠는데 막상 해 먹자니 물컹할 것 같아 꺼려졌다. 근데 기름을 둘러 구우니 고소하니 맛있고 식감도 살아 있었다. 어떻게 조리하냐에 따라 같은 가지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지금은 내가 키운 가지로 솥밥도 만들고, 라따뚜이도 만들고, 그냥 구워도 먹고 있다. 그 물컹함까지 좋아하는 날이 온 거다. 모태솔로 남편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제대로만 잘 조리하면 재미없어 보임 속에 숨은 재미가 있다. 내가 기름이 되어, 혹은 토마토소스가 되어 그와 맛있게 어울려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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