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평 텃밭에 상추, 토마토, 가지, 오이, 고추, 고구마, 감자, 애플수박, 애호박, 강낭콩, 케일, 쑥갓, 수세미, 바질, 대파를 심었다. 고추, 토마토만 혹은 고구마만 심은 옆 밭들과는 다르게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어 느낌의 밭. 약간 정신산만 하지만 그 덕분에 뭐든 빨리 질려하는 내게 여전히 가장 흥미로운 밭. 열 다섯 종류의 작물 대부분 조금씩 심어 우리 부부 먹기에도 빠듯하지만, 유일하게 인심 쓸 수 있는 게 있으니 바로 상추다.
상추 모종은 4개에 천 원이었다. 다이소에서 천 원짜리 씨앗을 사 직접 기른 것도 있으니, 상추에 든 돈은 총 2천 원. 시장에서 사 온 모종과 심심풀이로 길러본 모종 그리고 씨앗을 밭에 심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상추의 크는 속도가 자연스럽게 차이 났고 매번 싱싱한 것들을 따 먹을 수 있었다. 밭에 갈 때마다 커다란 소쿠리 가득 매번 새 잎을 내어준 상추는 씻는 게 힘들어 수확을 머뭇거릴 정도로 잘 자라주었다.
도시에 살던 나는 늘 마트에서 스무 장 남짓한 잎을 2-3천 원 주고 사 먹었고 그마저도 비가 오면 가격이 두 세배는 너끈히 올라 아껴먹곤 했는데 이젠 너무 많아 썩을까 걱정해야 한다. 상추쌈, 상추 비빔밥, 상추 샐러드, 상추 비빔면, 상추 겉절이 등등. 상추로 할 수 있는 모든 요리를 다 하고도 넘쳐나는 상추를 위해 초록 반찬통도 샀다. 음식의 부패를 늦춰준다는 그 반찬통마저 다 채우고 마침내 자라는 속도를 먹는 속도가 따라잡기 불가능한 때가 찾아왔다. 본격적인 상추 밀어내기가 시작된 초여름, 그즈음엔 엄마 친구들의 밭에도 상추가 넘쳐나 본가도 상추에 점령당했다.
이웃은커녕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나는 직접 키운 자식 같은(?) 상추를 아무에게나 주고 싶진 않았다. 얼마 없는 친구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만나자며 연락을 했다. 먼저 연락도, 더더욱 만나자는 연락은 하지 않던 터라 처음엔 고작 상추 때문에 불러내는 게 맞나 싶었지만 흔쾌히 나와 주었다. 끼리끼리라는 말 그대로 내 주변엔 다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애들뿐이라 밭에서 상추를 길러 건네주면 놀랬다. 심지어 마트 상추랑 맛이 다르다며 베란다 텃밭이라도 해보겠다 하는 사람도 있어 더 부지런히 따 날랐다. 잎을 씻고 말려 예쁜 지퍼백에 담았다.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정성이 담긴 상추는 사느라 바쁜 친구에게, 옆자리에서 많이 알려주는 직장 선배에게 주었다.
말로 하는 표현이 서툰 내게 상추는 좋은 핑계였다. '보고 싶어'라는 말보다는 '상추 좀 먹을래?' '고마워'보다는 '상추 줄게 나와'. 이 참에 얼굴도 보고, 반가운 소식도 듣는 건 덤이다. 봄 상추는 뽑고 가을 상추를 새로 심을 시간이다. 올 가을에도 부지런히 길러 여기저기 나눠줄 예정이다. 2천 원으로 누리기엔 귀한 마음을, 정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