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회사와 내 회사의 거리는 100킬로가 조금 안 된다. 우리는 그 중간인 경기도에 신혼집을 얻었고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을 기대했다. 하지만 아침 여섯 시에 출발해 저녁 여덟 시에 겨우 돌아오는 생활을 하면 집에서 자기 바빴다. 퀭한 얼굴로 지친 상태로 괴로워하기보다는 당분간 평일에는 내가 서울 본가에서 지내며 주말에만 만나는 주말부부를 하기로 했다. 아직 아이가 없어 가능하지만 언제까지 이 생활이 가능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이직이나 퇴사를 하지 않는 이상 둘 중 하나는 이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우리의 오랜 고민이었다.
사실 우리 부부는 둘 다 도시에서 자라 '학교-학원-집(아파트)-마트, 편의점' 주로 이 생활 반경 안에서 살았기에 시골이나 텃밭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텃밭을 하게 된 건 채소값을 줄여보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시골살이를 해보고 싶다는 이유도 컸다. 언젠가 아이를 낳고 마침내 매일 같이 사는 가족이 되면 남편의 회사가 가까운 시골 어딘가에 전원주택을 짓고 살자는 희미한 소망을 품고 있다. 주택에 살면 마당에 밭이라도 가꿔야 시간이 잘 갈 테니 (착각이었다!) 미리 해보자는 마음에 시작한 텃밭이었다.
텃밭을 한다고 하면 주변 반응은 크게 '남편이 그걸 같이 해줘?' 혹은 '그 힘든걸 왜 돈 주고 하니, 그 돈으로 차라리 마음껏 채소 사 먹는 게 낫겠다', '그 나이에 벌써?'로 나뉜다. 밭에 가도 은퇴한 부부나, 어린아이를 데려온 부모가 대부분이고 내 또래는 볼 수가 없다. 내가 특이한 건가 싶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던 사람이다. 어릴 땐 열심히 공부해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엔 안정적인 회사 다니며, 남들과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과 결혼했다. 앞으로 남은 숙제는 늦지 않은 나이에 적당한 수의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 위해 나는 회사에서 일을 하기. 정작 그렇게 자란 내가 행복해하지 않으면서 그런 삶을 되풀이시키려 하는 게 맞을까? 남들이 옳다고 말하는 삶을 그대로 통과해 봤자 정작 내가 내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우주비행사, 그러니까 최첨단 과학 기술이 집약된 그 분야에서, 의자를 제작할 때의 일이다. 당시 우주비행사들의 키, 다리 길이, 종아리 길이, 골반 둘레 등의 평균을 재고 그에 맞는 의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행사들이 계속해서 불편을 이야기해 조사해 보니 정작 그 의자에 맞는, 그러니까 평균 키, 평균 다리 길이, 평균 허리둘레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세상이 만든 평균, 그러니까 30대 평균 연봉, 평균 자산, 평균 결혼 연령에 맞춰 살려는 노력은 결국 나 한 사람을 위한 삶은 아니다.
텃밭을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났다. 주말엔 직접 기른 채소로 요리해 먹는다. 콜레스테롤, 혈압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 몸의 건강뿐 아니라 마음도 자랐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아휴 그만두고 싶다', 그러다가도 엄마 친구 딸보다는 돈을 더 벌고 싶어 갈팡질팡하던 마음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언젠가 시골살이를 위한 준비과정, 돈과 능력을 키우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월요일 아침이면 무겁게 툭 내려앉던 마음도, 더부룩하던 속도 요즘은 괜찮아지고 있다.
호박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애호박. 달큼한 맛은 찌개에 넣어도, 나물로 무쳐도, 심지어 채 썰어 국수로 먹어도 맛이 좋다. 애호박을 키우며 놀란 게 있다면 모양이다. 마트에 파는 원통형에 작고 예쁜 호박만 봤는데 야생의 호박은 제멋대로다. 크기도, 둘레도, 크는 속도도 제각각. 처음엔 늘 보던 모양과 달라 돌연변이인가 싶었는데 사실 모두 다 다른 게 맞다.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비닐을 둘러싸 같아 보였던 것일 뿐. 어릴 땐 언니가 '호박같이 생긴 게'라고 놀리면 화가 났는데 이제는 호박같이 생기고 싶다. 못생기고 커다랗고 그 안에 씨가 가득해 먹긴 힘들지만, 자기 마음대로 자란 밭의 호박. 평균의 비닐을 벗기고 자유로운 호박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