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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집가 Sep 07. 2024

티 안나는 러브레터

그 애를 처음 만난 건 2년 전 여름이었다. 남자친구네 집에 처음 인사 가는 날 식당에서 마주친 그는 식사시간 내내 뚫어져라 나를 쳐다봤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할 만큼 집요하게. 자리 탓인가 궁금해 이리저리 자리도 옮겨봤지만 그애의 눈은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태어나 첫 생일을 맞은 그 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불편한 한복에 짜증 내지도 않고, 계속되는 사진작가의 플래시 세례에도 울지 않았다. 처음 보는 내가 신기해서일 수도, 아니면 살면서 처음 보는 엄마가 아닌 젊은 여자라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그 애의 무지막지한 관심이 좋았다. 피로 연결된 낯선 남자친구네 가족들 사이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방인 나를 안정시키는 웃음이었다.


그 후 결혼준비를 하며 몇 차례, 결혼 후 명절에 몇 번 본 게 다인데 그 애는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 엄마가 좋아 외숙모가 좋아 물으면 '외퉁모'라고 답한다. 가족끼리 간 여행에서도 '여기 외퉁모 삼촌이랑 또 오자~ 맛있는 거 같이 먹자~'하며 나를 챙긴다. 남편과 영상통화를 하다가도 내가 안 보이면 '끊을까~?'라며 금세 흥미를 잃는다. 며칠 같이 보내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같이 서울에 가겠다며 울고 떼쓰기도 한다.


나도 어릴 땐 큰아빠와 헤어질 때마다 울고불고 난리 쳤었는데,

나도 어릴 땐 이모네 집에 살고 싶다고 할 때가 있었는데,

나도 어릴 땐 누군가의 배경에 관계없이 마냥 즐겁게 놀았던 때가 있었는데,


살면서 상처입을 때마다 한 겹 씩 쳐지던 방어막이, 한 번씩 실패할 때마다 깊어지던 무관심이 쌓여 요즘의 내가 됐다. 퇴사하면 어차피 남이라는 생각에 벽을 치고, 성격이 조금만 달라도 어차피 오래 볼 사람 아니라며 선을 긋는 요즘의 나는 그 애의 천진난만함과 무지함이 부럽다.

사람을 싫어하고 부대껴하는 내가 택한 건 식물이다. 집안에서 기르는걸론 부족해 텃밭 분양을 받고 매주 집 밖의 식물들을 관리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식물이 좋아할까 싶어 퇴비를 마구 부어댄다. 그 아이가 겁내지 않고 사랑을 붓듯이. 같은 양의 퇴비를 부어도 수박은 잘 자라고 상추는 버거워한다. 그렇게 식물마다 좋아하는 게 다르다는 걸 배운다. 모르니 알고 싶고 알고 싶으니 찾아보게 된다. 상추가 좋아하는 환경, 케일의 잎을 구멍 내 쫓아내야 하는 흰나비 애벌레, 애호박 꽃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벌을 구분한다. 그전까지는 그냥 ‘벌레~~ 에고 싫어’하던 애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하나씩 구별한다.


식물을 보다 보면 유독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애호박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괴로워하던 사회 초년생일 때의 내가, 강낭콩은 콩밥을 부드럽게 만드는 엄마가, 오이는 오이무침을 좋아하는 아빠가, 쑥갓은 된장국을 잘 끓이는 시어머니가. 그리고 가지는 가지가지하는 남편이. 이 글은 텃밭 작물을 핑계로 써 내려간 러브레터다. 말없는 식물들에게 말 붙여가며 직접 해석한 사람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식물을 기른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식물이 나를 길렀던 봄과 여름이 지나간다. 좁은 시야로 나만 알고 내가 당한 것만 기억하던 나는 이제 점점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채려 한다. 이해가 안 되는 사람도 꾸역꾸역 이해하려 한다. 시절인연으로 끝날 지라도, 그 시절을 기왕이면 좋게 남기고 싶다. 그 시절들이 쌓여 내일의 내가 될 것이기에.


지난겨울 그 아이를 봤을 땐 나를 때렸다. 아파서 화를 내니 ‘좋아서 그래떠요 ‘라며 애교를 피운다. 올봄에 만나니 그새 컸는지 더 이상 때리지 않는다. 다만 침을 뱉는다. 다음에 볼 땐 침을 안 뱉고 또 다른 행동을 하겠지. 그 애가 커가는 과정을 보는 건 즐겁다. 아무것도 모르던 한 사람이 배우고 익히고 혼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날을 통과하곤,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태어난 지 이제 겨우 천일 지난 아이를 통해,말 못하는 식물을 통해 배운다.



반려채소 시즌 1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텃밭은 봄 여름 작물들을 잘 길러냈고, 가을을 위해 잠시 쉬고 있어요. 글감도 식물도 잘 길러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봐주신 십만명이 넘는 독자분들 감사해요>_<


텃밭 이야기를 채우는 동안 직장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다음주의 제가 부디 번복하지 않길..)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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