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현실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동화를 보면 항상 나오는 말,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내 해외생활도 그런 동화이길 바랐다. 어려움 없이, 추억과 행복만 가득한 생활. 하지만 내 해외생활은 동화가 아니었다. 낭만과 현실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내 해외생활은 꿈같으면서도 꽤 현실적이었다.
해외에 사는 내내 매일 크고 작은 사건을 마주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실전이란 듯, 매번 예상 밖의 일이 터져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마치 '잘 준비했다는 건 네 착각이야‘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물론 처음 해외를 나가던 순간에도 예외는 없었고.
비행기에서 감정의 소용돌이를 한 차례 겪고 다시 마음을 잡은 내게 주어진 종이 2장.
이게 뭐지? 싶었는데, 입국할 때 필요한 서식이었다. 사실 준비하는 내내 입국하는 순간은 내 머릿속에 없었다. 영어로 소통하는 데 큰 무리가 없기도 하고, 나한테 해외 생활은 떠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시작이라 여겼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 있지 싶지만 그때 당시엔 그 종이를 받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마주했다는 당혹감, 함께 간 지인도 없고, 밤비행기에 창가자리라 승무원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어려운 상황, 입국에 문제가 생기는 거 아냐? 괜한 걱정까지. 진짜 해외초보다운 걱정과 당황스러움이었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던 건 조용히 그 종이를 뚫어져라 보는 것뿐이었다. 영어를 읽고 쓰는데 어려움은 없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런 내가 놓친 게 있다면 나는 무지하면 더 겁을 먹는 사람이라는 것과 ‘처음’ 그 자체에 더 압도당해 실제보다 그 상황을 더 심각하게 여겼다는 것. 말도 안 되는 겁을 먹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종이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나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우연히 내 옆좌석에 앉은 사람들이었다. 종이를 참고해서 서로 대화하며 채우던 그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조심스럽고, 두 분을 방해하는 게 아닐까 잠시 고민됐지만 나한테 남은 방법이 이거 하나니 어쩌겠나.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다행히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너무나 친절했다. 본인들이 가져온 종이를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해 줄 정도로. 친절한 옆좌석 사람들 덕분에 난 무사히 종이를 작성할 수 있었다.
입국하기도 전에 마주한 당황스러움에 잠시 아찔했지만 그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었다. 지금처럼 망설이지 않고 행동하면 어떤 어려움이든 다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앞으로 해외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문제를 겪겠지만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마주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어쩌면 그 경험 덕분에 다사다난했던 첫 해외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당황한 것에 비하면 이 정도야 뭐 하면서 넘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때도 해결했는데 지금도 못할 건 뭐 있어, 이 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지 하는 마음으로.
어쨌든 나는 2,813 km을 날아 마침내 세부에 도착했다. 다행히 입국 절차는 간단히 통과해 첫 해외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내가 진짜 해외에 있다는 그 설렘을. 그리고 지금도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마치 5초 전에 느낀 것처럼 지금도 너무 생생한 세부의 후덥지근한 공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