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60 학생들의 놀이, 취미 생활

놀이, 취미, 음악, 영화

by BeyonJ



내가 어린 시절 남자애들의 놀이는 제기차기, 비석 치기, 자치기, 딱지치기, 구슬치기가 보편적인 놀이였다. 시골에서나 서울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시골에서는 겨울에 연날리기를 하거나 얼어붙은 논에 가서 썰매 타기도 했었다.


원주에서 살던 1–2 학년 때는 했던 놀이는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었고, 2살 위의 작은형이 그 친구들과 냇가로 놀러 갈 때 나도 따라가겠다 하면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피했던 생각이 난다. 서울에 올라와서 서대문 미동 국민학교 3학년 때는 아직 서울 와서 얼마 안 되어서 어리벙벙할 때였고, 재동/계동으로 이사 와서 재동 국민학교 4학년 때는 학교 전학 와서 첫해에 아직 자리잡기 전이었고, 5학년 때는 6월에 6.25 사변이 나서 별로 이렇다 할 추억은 없다.


한 가지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전쟁 전, 서울에서 내가 4–5 학년 때 다른 동네 아이들과 돌팔매 싸움이 유행했었던 적이 있다. 우리 동네 애들이 다른 동네 쳐들어가거나 다른 동네 애들이 우리 동네 (우리 골목)으로 쳐들어와서 서로 돌멩이를 던져 다치게 하는 위험한 장난이었는데, 그로 인한 큰 부상은 본 적이 없긴 하다. 나중에 사람들 얘기가 6.25 전쟁이 일어날 전조로 그렇게 애들이 패싸움을 했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그게 사실인지 전쟁 이후 그다음에는 그런 패싸움은 듣거나 본 적이 없다.


학창생활 중 취미 생활이랄 것도 없었던 것 같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별로 운동(특히 구기종목)에는 흥미도 소질도 갖고 있지 않았었다. 또 음악(성악/기악), 미술 같은 예술분야는 정말 소질이 없어 흥미도 없고, 노력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별로 후회도 없다. 하다못해 누구나 취미란에 쓰는 “음악 감상”도 내 취미는 아니었다. 유학 갔던 큰형이 미국에서 돌아올 때 사온 LP 판 고전 음악도 느긋하게 감상해본 적이 몇 번 없다.


고전음악은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르네상스 음악실, 그 외 돌체다방 밑 몇 개 고전음악다방들에는 음악 감상하고 앉아있는 학생들이 여러 있었다. 나는 코드가 맞지 않아 몇 번 가보지 아니하였고, 대신 시끄러운 팦송 다방 (명동 은하수, 광화문 황정유, 종로 2가 종로 싸롱 등)에는 거의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돈이 아까워 한번 들르면 2–3시간씩 뿌리를 뽑고 나왔었다. 대학 1년 당시 최고의 가수는 Paul Anka, 나중에 Neil Sedaka 등이 있었고. 영화 음악 A Certain Smile의 Johnny Mathis의 노래를 좋아했다. 나중에는 The Platters의 노래들은 다 좋아했는데, 그들의 노래는 지금도 들으면 좋다.


대학 때는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고상한 취미 하나 갖지 못한 것 같다. 내 주위에 그런 친구가 없어서 그랬었나, 그때는 갈만한 미술관, 박물관도 없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과문의 소치였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도 연극 공연은 있었는데 (배우 김동원, 이해랑), 웬일인지 난 연극 구경 간 적은 없다.

영화는 그런대로 많이 보러 다녔는데 대학시절 어느 해 끝에 그 해 상연된 영화 리스트가 나왔는데 세보니까 50개가 되더라. 주로 즐겼던 영화는 Burt Lancaster, Kirk Douglas, Robert Taylor, Deborah Kerr, Liz Taylor 등 주로 western 들이나 고대 및 중세 adventure 물 등을 좋아했는데, 이런 장르가 아닌 “7인의 신부” (Seven Brides for Seven Brothers)라는 Howard Keel주연의 musical comedy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3번을 보았다. 그렇지만, 개봉관에서의 관람은 1년에 댓 번이나 보았을까? 거의 2차 개봉관, 2류 영화관에서 보았다.


고등학교 1년 땐가, 엄마가 연탄가스 마시고 졸도해서 (당시 연탄이란 연료가 처음 등장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는지 방안에 아직 열이 식지 않은 뜨거운 연탄재를 갖고 화로에 넣어 쪼이기도 했던 터라)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서 하루 밤새고 퇴원한 일이 있다. 그때 내가 누나하고 병원에서 하룻밤 새웠었다. 그 날 수고했다고 아버지가 돈을 주셔서, 난생처음 나 혼자 독자적으로 당시 개봉해서 인기 중인 “춘향전” (조미령, 이향 주연인데 16세 청춘 역으로는 너무 나이가 들었던 캐스팅이었지만)을 보았는데, 그것이 개봉관에서 영화 본 것으로는, 국민학교 2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단체로 “똘똘이의 모험”이란 영화를 본 다음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특별히 한국영화 fan은 아니었는데, 한국 영화로는 아주 선풍적 주의를 끄는 영화 가 있을 때 보기는 했다. “연산군”, “벽속의 여자” “별아 내 가슴에”,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등이 있다. 몇 개 되지도 않았지만 보고 나서도 별로 그럴듯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나는 당시 할리우드 영화들 같이 보고 나면, 내용이 딱 정리되는 경쾌한 내용의 것들이 좋았다.




어렸을 때 여자아이들 놀이라고는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등이었는데, 또 골목길에서 널뛰기를 하기도 했는데 내가 널뛰기를 잘했단 말이야. 국민학교 다닐 때엔 만화가게도 있었다. 만화책 하나 빌리면 여럿이 들여다보곤 했는데, 내가 친구들한테 크게 읽어주다가 지나가던 선생님한테 들키기도 했다.


둘째 언니가 무역회사에 취직하고 나서 아버지가 을지로 입구에 있는 가게에서 영문 타이프라이터를 사주셨는데, 우리 모두 재미있어서, 타이프 치는 장난하고 가지고 놀았지. 또 큰언니가 월급 타서는 “타이푼켄”이라는 독일제 (국산이 없을 때) 레코드를 사서 LP 판을 사서 둘러앉아 들었어. 클래식판도 있었고, 장소팔 코미디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 강당(삼일당)에서 유명 클래식 가수 공연도, 오페라도 공연해서 학생들도 다 구경했지. 라보엠, 토스카, 칼멘, 라 트라비아타 그때 다 구경했어. 유명한 바리톤 (조상현, 양천종) 선생님도 우리 학교 음악 선생님이셨어. (참, 우리 고등학교 때 연대에 계시던 김동길 선생님한테서도 영어를 1년 배웠다).


우리 학생 시절에는 가요 같은 건 거의 안 듣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클래식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즐겨 들었는데, 마리오 란자에 열광했었지. 팝송을 주로 들었는데, 재즈음악이 유행이었어. 그때는 그런 음악이 재즈이라는 것도 몰랐고, 나중에야 재즈음악인지 알았어. 일본 발음으로 “쟈-즈”라고 했다.


내가 중, 고등학교 다니던 그때는 라디오의 인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 우리 집엔 “제니스”란 미국제 커다란 라디오가 있었는데 밤마다 듣는 라디오 연속극은 식구들이 삥 둘러앉아서 웃고 울고 했지 (물론 생방송) 그 후에 TV가 생긴 후도 다 생방송이었지.


집에 TV는 있었지만 한국 방송이 없었고 미 8군에서 방송국 (배가본드)에 저녁에 1시간을 빌려서 방송해주곤 했어. 토요일 오후엔, “Teen Canteen” 이란 AFKN 프로에 미국 청소년들이 춤추는 시간을 방송했는데 우리는 그걸, 한주도 빠짐없이 봤지 (트위스트 같은 신나는 춤). 고 3 때 경주 수학여행 가서 방에서 모두들 이 춤을 추고 그랬어.


대학 때는 내 친한 친구와 짐 리브스 노래를 많이 따라 했다. 팻 분, 냇 킹 콜(나는 지금도 밤마다 컴퓨터 하면서 듣는다), 쟈니 마티스, 베니 굿맨, 플레터스 (남편이 좋아하는), 짐 리브스, 루이 암스트롱 등등을 많이 들었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가수는 영국 가수 잉글버트 험벌팅크였다.


내가, 고등학교, 대학 때는 음악감상실이 있었어. “르네상스”였던 거 같은데, 정확한 이름이 생각 안 나서 속상하다. 소극장같이 자그마한 방에 의자 놓고 앞에는 천막 친 무대가 있었고 뒤에 있는 부스실에서 음악을 틀어줬는데, 지금 돈 1,000원쯤 내고 들어가면 커피 한잔 주고 시간제한 없이 클래식 음악을 들었지. 한편에 레코드를 잔뜩 넣은 부스 실안에 DJ 가 신청곡 쪽지를 받아서 노래를 틀어주곤 했지. 지금 광화문 보신각 뒤에 지하 “리버티” 다방에 방과 후에 많이들 몰려가서 노래 듣고 했지.


내가 대학 다닐 땐 한국 가요도 많아졌는데 거의가 미국 팝송의 번안가요였지. 남성 4인조 ”Four Clovers”의 유주용, (내가 젤 좋아하던) 위키리, 박형준, 최희준, 쟈니 브라더스 4인. 김상희 등 미 8군 출신들이 많았지. 그때 가수들, 노래 참 잘했어. 정통 가요들도 많았지만 나를 비롯한 그때 학생들은 정통 가요보다는 팝송이나 번안가요를 좋아했지.


그때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11월부터 전파사에서 (가전제품을 고쳐 쓰던 시대라) 캐럴을 크게 틀고는 했었는데. 크리스마스 때는 일 년에 2번 있는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날이라 밤새도록 명동과 종로에는 젊은이들이 넘쳐났지.


난, 영화를 많이 봤다. 그 시대의 내로라하던 미국이나 유럽의 영화를 많이 봤거든.

나의 부모님도 영화를 좋아하셔서, 영화관 가실 때 나도 때때로 쫓아가기도 했지. 엄마가 좋아하시던 배우는 로버트 테일러 (1911–1969), 나는 프랑스 배우 알랑 드롱을 좋아했어.


옛날 극장에는 좌석표라는 것도 없었고 1회 2회라는 표시도 없었지. 표를 사면 영화 중간쯤에서 보고 다음 상영에서 본 데까지 보고 나오는 거야. 개봉관엔 항상 줄을 엄청나게 섰고 (그 시대의 유일한 볼거리) 암표 장사는 항상 있었지 아줌마나 아저씨들이 줄 서있는 사람 옆에 슬쩍 다가와선 “표 있어요” 하곤 했지.


그때는 미국에서 상영한 후 2, 3년이 지나야 우리나라에 들어왔어. 기라성 같은 배우들로는 비비안 리, 로버트 테일러 (영화 애수의 주인공), 데보라 카, 모린 오하라, 라나 터너, 시몬 시뇨레 (불란서 이브 몽땅의 전처), 오드리 헵번, 도리스 데이 (가수이기도 함), 에바 가드너, 캐서린 햅번, 잉그릿드 버그만, 지나 로로 브리지다 (이태리 배우, 별명 지나 허리 부러지다), 쥬디 가란드, 로렌 바콜, 마리아 쉘 (남동생도 배우), 마릴린 몬로 (노래도 잘했어), 쟈넷리, 진 시몬스 (인디언 처녀로 자주 나왔지), 앤 블라이스, 밋지 게이너 (영화 남태평양), 레슬리 케론 (노래를 잘했어), 실바나 망가노, 리즈 테일러 (작은아씨들에서 아역)등의 배우들은 거의 192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야.


그때는 한국영화도 전성기였는데, 어쩐 이유인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국민학교 5, 6학년쯤인가? 국도극장에서 “눈이 나리는데”라는 김진규, 주증녀 주연의 영화를 봤는데 남편은 군대 가고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엄청 구박받는 내용인데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울면서 봤는지. 근데, 우리 부녀가 거길 왜 단둘이 갔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


고등학교 시절엔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 보여주고 그랬어.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대한극장(그때 처음 생김)에 단체로 갔는데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남태평양, 미국 영화 밋지 게이너 주연)를 보러 갔었는데 모두들 그렇게 큰 화면을 보고 놀랐지.


4.19가 나던 날 (1960년, 나 고등학교 때) 은 “삼일당”에서 “슬픔은 그대 가슴에” (라나 터너와 샌드라 디)라는 미국 영화를 오후에 보기로 했는데 밖에서 막 총소리가 나고 그래서 다 취소됐지. 그날, 아주 무서운 날이었어. 집에 전화 걸어 데리러 와야지 집에 보냈는데, 그때는 집에 거의 전화들이 없던 시절이라, 우리 집으로 친구들도 데려가고 했지. 집에 가는 길에 피 흘리는 학생들을 리어카에 싣고 가는 것도 보고, 청와대가 가까운 동네라 아주 많이 무서웠고 위험했지. 4.19 나던 날은 어찌나 더웠는지 반팔 입는 계절이 아니었는데도 집에 와서 반팔을 입은 기억이 나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닐 때는 “마카로니 웨스턴 (aka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가 유행할 때여서 일요일에는 영화를 보러 가곤 했지. 유럽 영화도 많았어. 나는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해서, 엘비스 영화 중 한국에서 상영한 영화는 거의 다 봤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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