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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보라 Oct 14. 2020

장녀로 살지 말고, '나'로 살아가기

헤르만 헤세『수레바퀴 아래서』그리고 『데미안』을 읽고

<3부 책>

“역시 장녀는 듬직해!”

‘K-장녀’라는 신조어가 있다. 코리아(Korea)의 ‘K’와 맏딸을 뜻하는 ‘장녀’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우리 집 분위기는 ‘맏딸은 살림 밑천’까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장녀이기에 ‘K-장녀’라는 단어 속에 담긴 자조적인 웃음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학창 시절에 잠깐 예체능 계열로 진학하고 싶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그림 그리는 것이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이러한 의견을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부모님께서는 ‘그래도 장녀는’ 예체능 계열로 진학하는 것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그냥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공부에 더 매진하기로 하였다. 


 물론, 열정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예체능 계열로 진학하지 못한 첫째 이유라는 것을 잘 안다. 부모님께 대들어보거나 혹은 진지하게 다시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녀’ 혹은 ‘장남’인 사람은 왜 섣불리 그러지 못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주변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이상한 책임감. 무언가를 양보해야겠다는 묘한 강박, 무언가를 일으켜야겠다는(딱히 무너지지도 않았는데) 쓸데없는 의무감. 내가 열정이 부족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지만 ‘장녀’라는 나의 직분이 나의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어떠한 ‘직분’을 갖게 된다. 장녀, 막내아들, 오빠, 여자 친구, 학생, 취업 준비생, 부모, 신입사원, 대리, 팀장……. 이러한 직분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유지되거나 변화되면서 그 사람의 역할을 규정한다. 그리고 사람은 이 역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가 ‘역할’과 ‘나의 방향’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든다. 직분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의 가치관과 나의 기대 역할 사이에서 갈등에 빠지게 된다.      


『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다. 작은 마을에서 보기 드물게 학업에 있어 뛰어난 재능을 보인 한스는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 소도시에서는 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신학교 입학시험을 무려 2등으로 통과하게 된다. 한스가 신학교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한스는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신학교에서의 한스는 냉정한 분위기와 엄격한 규칙으로 지쳐가고 결국 신경쇠약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한스는 환영받지 못한다. 과거 고향 사람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했지만 신학교를 자퇴한 그는 그저 평범한 소년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한스에게 다른 친구들처럼 기계공이 되라고 했고 한스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기계공으로서 한스는 몸도 약하고 기술도 부족한 수습공이었다. 그렇게 동료들과 일을 배우고 함께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스는 하얀 달빛이 비치는 강에 빠져 죽게 된다.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 그래야지 친애하는 기벤라트 군. 다만 너무 지쳐서는 안 되네.
그러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버릴 테니까.”  


 한스는 자신의 직분에 너무 충실했던 나머지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버렸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맏딸이자 사회초년생이자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하는 나이….  그리고 앞으로 부여받게 될 더 큰 역할들…. 하지만 역할에만 매몰된다면 나 역시 한스처럼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버릴 것 같다.      


 10대와 20대의 나를 돌이켜본다. 내 진정한 목소리가 아닌, 나의 역할에만 몰두해온 삶이었던 것 같다. 내가 학창 시절 예체능 계열로 가고 싶다는 목소리에 조금만 더 귀 기울였으면, 지금쯤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것을 하며 참고 견뎠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참고 견디는 것만 잘하는 내가 있었다.  

 퇴근 후에 시간은 분명히 남았는데,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몰라서 멍하니 휴대폰만 바라보고서는 허무한 기분이 들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본다.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에 우물쭈물하던 나를 떠올려본다. 

 지금이라도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다. 내 안에서 목소리가 들릴 때 내 목소리가 누군가의 마음에 들까, 들지 않을까 의문을 던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쏟아지는, 앞으로 나에게 쏟아질 역할 기대에 나답게 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하지만 모든 역할 기대를 걷어내면 결국 내 인생에서 나의 역할은 단 한 가지, 나답게 사는 것 그거 하나 아닐까? 

 


"어쩌면 시인 혹은 예언자 혹은 화가 혹은 어떻게든 나를 위해 예비되었을 역할들을 꿈꾸곤 했다.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기 위해, 설교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직분이란 단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데미안』(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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