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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Jan 07. 2021

진정서

정인아 미안해.

존경하는 재판장님,

아이의 얼굴을 한번 봐주세요. 아이의 얼굴에 담긴 슬픔을 한번 보아주세요. 

그 지치고 곤한 아이의 표정을 본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의 예쁘게 웃던 웃음이 그토록 굳고 단단하게 변했을 때 아이는 이미 죽어버렸다는 것을요. 살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혹여 실수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죽음에 길 한가운데에 그 아이를 세워 둔 사람. 조금씩 조금씩 죽음에 가까워져 간 그 길에 등을 떠민 사람. 정인이의 웃음을 죽이고 정인이의 마음을 죽이고 정인이의 생을 죽이고 끝끝내 생명마저 끈어 낸 그들의 손을 실수였다 우연이였다라고 맞잡아 줄 수 있을까요? 16살이 아니라고 그 아이는 16개월의 갓 돌이 지난 아이였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살인이 아닐 수 없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 양부가, 그 양모가 처음 아이를 키워보는 것도 아닌 이미 부모인 그들이 아이를 그리 다루면 아이의 마음이 병들고 아이의 몸이 병들어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몰랐다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난임 병원을 가면 아이를 가지고 싶은 간절함을 가슴에 품고 몇 해를 몸과 마음의 고통을 감수하는 이들이 빽빽이 앉아 진료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 또한 난임 병원을 통해 어렵게 한 아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라에서 출신 장려정책의 일환으로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난임부부들에게 지원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토록 출산율이 낮고 아이가 귀한 이때에 우리나라가 인구 절벽에 맞닥뜨리고 나날이 최저 출산을 기록하는 이때에 아이를 학대하고 아이를 성폭행하고 아이를 살해하고 아이를 유괴하고 무엇이든지 아이를 건드릴 때에는 그게 무엇이든 정말 최악이 상황일 거라는 걸 알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죗값은 어느 것으로도 갚을 수 없을 것이며, 오로지 자신의 인생 전부를 내어주는 것 외에 아무것으로도 그 시간을 갚아 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출산 극복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하면서 한편으로 소중한 생명이 학대로 사라지는 것을 막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아동학대를 예방하고 막는 것이 가해자에게 엄벌을 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는 하나 아동학대 가해자의 형량이 올라가는 것은 사회적으로 이 문제를 조금 더 중요한 문제로 바라보겠다는, 아동학대라는 이름이 가벼이 치부되던 날들은 앞으로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가 되어 주지 않을까요. 이 판결 하나로 인해 우리의 인식이 바뀌고 인식이 바뀜으로 사회가 변화하고 이를 통해 학대를 당하는 단한명의 아이라도 구할 수 있는 씨앗이 되어줄 수 있지는 않을까요.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이 변화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언제나 때는 중요합니다. 놓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는 이때가 지나면 모두 아팠던 마음이 사그라들고 그 아이를 잊고 지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다들 그리 될 것입니다. 하지만 또 이런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다시 일어났을 때, 그때는 이런 진정서 따위를 쓰지 않아도 충분한 대가를 치를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충분한 대가 따위는 있을 수 없겠지만, 그 어떤 대가로도 몽우리조차 영글지 못하고 떠나버린 어린 한 생을 위로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신이 아닌 인간인 우리가 그들에게 물을 수 있는 대가. 그것까지는 꼭 죗값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작은 생명이 작디작은 몸으로 축 처져 버린 어깨로 걸을 수도 없었던 다리로 디디고 서서 자신의 온 생을 바쳐 희생하고 사라짐을 결코 헛되이 쓰이게 할 수 없습니다.  8개월 동안의 세상 가장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아프기만 했을, 그렇게 축 늘어진 어깨로 마지막을 맞았을 그 생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정인이를 우리 집 거실에 데려다 놓는 상상을 합니다. 아이의 장난감으로 가득한 이 곳에 정인이가 와서 노는 상상을 합니다. 그 축 처진 뒷모습이 그 어깨가 한없이 굽은 등이 잊히지를 않아서 떠오를 때마다 어김없이 눈물이 납니다. 이미 가버린 그 아이의 등을 쓸어주고 싶어서 따뜻한 밥 한 끼 맛있게 먹이고 싶어서 다정히 책 한 권 읽어주고 싶어서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싶어서 눈물이 납니다. 그토록 매섭고 차가운 눈빛과 손찌검에도 아이는 엄마엄마라고 부르며 엄마를 사랑하려 했을 것입니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래서 더 많이 안아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사랑받고 싶어서 더 많이 사랑받으려 노력하다 웃음을 잃고 표정을 잃고 말을 잃고 생을 잃었습니다.

국민정서에 맞는 판결이 아닌 고통 속에 희생당한 한 생애의 대가에 합당한 판결이기를 바라봅니다. 제발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진정서라는 것을 썼다.

이렇게 쓰는 게 맞는지, 이렇게 써도 도움이 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서, 티끌 하나 보태고 싶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썼다. 


아이는 이미 없는데 싶어서 마음이 허망하다.

기사를 찾아보면 괴롭다. 그러나 보지 않으면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 같아 괴롭다.

아이의 생이 아직 여기 있는 듯하다. 우리의 앞으로를 바꿔버릴 작고 큰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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