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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니 Mar 25. 2021

허술한 출산 준비물 리스트

뾰족한 엄마를 무장해제시키는 작은 사람

내 몸속에 작은 생명이 꿈틀대고 있다는 것을 안 이후로 나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이를 품다니! 아무리 믿어보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 응. 그렇구나 하고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 내 일이 되니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설렘과 기대로만 매일을 보내기엔 내 얼굴은 이미 사연 많은 여자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큰 파도를 만난 돛단배처럼 나는 방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다가 물속으로 이내 가라앉아 버린 느낌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나는 아직 여러모로 불완전한 사람이 아닌가? 이런 류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임신 7개월, 인정하기로 했다. 늘 곁에 두어야 했던 입덧 약에서도 해방되었고 변기통을 부여잡고 화장실 바닥에 축 쳐져 있던 생활도 끝난 시점이었다. 출산이 곧 다가옴을 느끼고는 슬슬 출산 목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부지런하고 꼼꼼한 선배 엄마들이 인터넷에 정리/배포한 엑셀 파일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A부터 Z까지 그 안에 정리된 것들만 사놓으면 출산 준비는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친절하고 자상한 선배 엄마들의 <출산 준비물 리스트>를 몇 개 비교하며 보고 있자니 나는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나로서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것들이었다. 분유 제조기, 분유 포트, 젖병 등 필요한 물품은 알겠으나 그 물품마다 다양한 브랜드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힘이 탁 빠졌다.


모든 답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답에 내가 조금의 노력만 더하면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아이의 물건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곧 태어날 아이가 그 물건들을 사용하는 상상을 하면서, 예비 엄마로서의 육아 시나리오를 마음껏 펼쳐볼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컴퓨터 화면을 닫았다. 핸드폰에서도 해당 인터넷 목록을 삭제해버렸다. 내가 보기에 당장 필요해 보이는 물품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일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내가 그 일조차 버겁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곧 태어날 아이를 맞이하는 상상을 하며, 들뜬 마음으로 그 리스트를 보고 있을 예비 엄마들과 나는 어떤 점이 다른 것일까. 내가 그녀들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당시 나는 많이 불안했던 것이다. 몸속에 있던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 함께 부대끼며 사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걱정이 나를 크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내가 세워놓은 이상의 엄마와 현실의 내 모습 사이의 끝없는 틈을 자각하고 나는 두려워졌고 어떤 때는 회피하고 싶기도 했다. 엄마라는 (그 당시에는) 버거운 책임감이 나를 짓눌렀고, 잘 키우고 싶다는 은근한 강박이 나를 조바심 나게 했다. 


마음이 불편한 상태에서는 아주 조그만 자극에도 쉽게 터져버리기 마련이다. 짓눌려있던 나는 다른 이의 <완벽한 출산준비물 리스트>를 보고는 괜한 성을 내버렸다. 누구에게 성을 내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마음이 답답한 것인지, 그 대상도 방향도 모른 채, 나는 나를 불필요하게 깎아내렸다.   






오늘로 아이는 생후 871일. 태어난 지 만 2년 4개월이 조금 넘었다. 그 당시의 날 서있던 나를 회상하며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여전히 엄마의 역할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지만, 이제는 완벽해지고 싶은 강박은 전혀 없다. 완벽한 엄마는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고, '엄마'라는 단어에 너무 많은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저 나는 이 작은 아이를 품고 낳은 사람. 아이의 속도를 지켜봐 주고 과속 안 하기. 아이와 오래오래 서로 찐하게 사랑하는 관계로 남기를. 그리고 때가 되면 질척거리지 않고 잘 이별하기. 아직 어린아이를 두고 이별을 생각하다니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말이다.  


요즘 아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든다.


불안했던 나를, 걱정으로 완전 무장했던 나를

기어이 아무 생각이 들지 않게 그저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존재.


작은 사람은 이렇게 몸만 커버린 사람에게 온몸으로 사랑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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