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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니 Jan 19. 2021

입덧 약이라는 구원

선생님, 저 제발 입덧약 좀 주세요.

두 돌이 훌쩍 지난 딸은 요즘 한창 말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발에 차이는 것마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라며 수없이 묻는다. "이건 ____야." 내가 대답하면, 아이는 그렇냐는 듯이 내 말을 똑같이 되풀이하고는 단어를 꾹꾹 씹어 머릿속에 입력한다.


며칠 전, 아이는 여느 때처럼 내 앞에 어떤 물건을 불쑥 내밀며 "이게 뭐야?"를 외쳐댔다. 가만있어 보자...... 어디서 많이 본 듯 한 물건이었다. 아이의 손을 펼쳐 보고는 그게 무슨 물건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바로 입덧 약(디클렉틴) 통이었다.


"아 그건 입. 덧. 약. 이야." 괜히 나도 모르게 힘을 주며 이야기했다. "입덧 약이야~~~" 아이는 내 말을 한번 따라 하더니 약통을 들고 거실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 약통 안에는 알약이 몇 알 남아있었고, 아이가 약통을 흔들 때마다 경쾌한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약통은  아이가 손에 쥐기에 딱 알맞은 사이즈였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그 날 하루 종일 그 입덧 약통을 손에 꼭 쥐고 다녔다.




나는 임신 6주 차에 들어서자마자 입덧이 시작됐다. 대학원 막학기가 이제 막 시작한 때였고, 개강 1주 차였다. 결혼 직후 연고 없는 경상도 지방으로 내려가서 생활하게 된 나는, 주 1회 KTX와 지하철을 이용해서 서울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할 요량이었다. 왕복 약 6시간.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마지막 학기라는 것에 위안을 삼았다. 논문의 방향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 지도교수와 끝없는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마음으로 새 학기를 시작한 순간이었다.


'임신했어도 뭐, 마지막 학긴데. 휴학할 수는 없잖아. 논문 완성은 못하더라도 남은 수업이라도 들어야지.'

휴학이라는 옵션은 생각해본 적 없던 나는, 임신 사실을 알고도 마지막 학기 일정을 소화하려고 했다. 물러설 수 없는 내 마지막 타협점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여느 때처럼 지하철은 만원이었고 나는 꿋꿋이 학교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학교로 향하는 도중 식은땀이 비 오듯 났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상태가 것이다. 강의실에 도착한 나는 이미 흠뻑 땀에 절어 있었다. 그 상태로 수업을 듣기란 불가능한 것이었고, 내 몸은 학교 생활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야만 했던 나는 조금 억울했다. 왜 하필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잘해보겠다고 마음먹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러는 것이냐고. 가만히 있다가도 억울한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나를 괴롭게 했다.


휴학 신청은 간단했다. 클릭 한 번으로 나는 졸업을 앞둔 막학기생에서 휴학생이 되었다. 뭐가 이렇게 간단하고 시시해. 진짜 별 거 없네. 나는 한동한 괜히 툴툴댔다.  





본격적으로 입덧이 시작됐다.

나는 잘 먹던 음식을 입에 넣고 씹는 것조차 힘들어했고, 겨우겨우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면 즉시 게워냈다. 물을 먹어도 쓴 맛이 강하게 올라왔다. 화장실의 변기통을 수시로 끌어안고 놓아주지 못했다. 볼품없이 쪼그려 앉은 내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줄 흘고 나는 아무런 의욕이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며칠 뒤 병원 검진을 가서 바로 입덧 약을 처방받았다.

"선생님, 저 입덧약 좀 처방해주세요."

 "얼굴을 보니 입덧 약 먹어야겠네.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 많이 나아질 거예요."



흰색 작은 두 알. 그 두 알이 내 몸속에서 하는 일은 굉장했다. 속은 계속 울렁거렸지만, 속을 게워내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음식'은' 삼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사실에 정말 감사했다. 하루에 적어도 열댓 번은 토해대던 삶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입덧 약은 보험적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도 비쌌지만, 당시 나에게는 비싼 약값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비싼 값이었어도 고민하지 않고 구매했을 것이다.


입덧 약을 먹으면서 음식으로 인한 구토는 현저히 줄었지만, 또 다른 복병이 생겼다. 바로 심한 무기력증. 입덧 약을 복용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 중 하나라고 했다. 아침에 눈을 떠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울렁거림과 무기력함이 만나니 아주 강력한 우울의 형상을 그렸다. 침대와 그대로 한 몸이 되어 눈만 겨우 껌뻑였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그대로 누워서는, 걷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입에 대충 욱여넣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뱃속에서 열심히 자라나고 있을 아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다.


나는 너무나 비생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나 자신의 모습이 쓸모없는 인간의 모습 같기도 했다. 남편과 함께 먹을 저녁을 차리고,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시시콜콜하게 이야기 나누던 일상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었다. 종일 아무런 표정도 없이 있던 나는, 컨디션이 유난히 좋지 않은 날에는 남편이 귀가해도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하루를 흘려보냈다. 나조차도 마주하기 힘들어했던 내 무표정의 얼굴을 남편에게 기어이, 그대로 내비친 날에는 유독 자책감이 몰려왔다.


나만 이렇게 힘든가?

아이가 생긴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왜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거야?


입덧이 이런 것이라고,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일 수도 있으며 네 몸과 정신을 다 갉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입덧이 아예 없을 수도 있지만, 심한 사람도 있다고. 그 정도의 차이가 너무 커서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다고. 왜 어떤 어른도 나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은 거야?


 제 힘으로 일어설 힘도, 말할 힘도 없던 나는 속에서 이런 울부짖음이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는 꼭 내 이야기를 해주겠노라 다짐했다. 입덧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이가 있거든, 적어도 '나는 입덧 조금 하긴 했는데. 그냥 이제는 생각이 잘 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입덧이라는 것에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겪은 사실을 그대로 말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 그 사실들을 말이다.


어른들은 임신 중의 어려움이나 육아의 고충 같은 힘든 시절들은 다 잊어버린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기억에서 사라지고 아무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잊고 싶지 않았다. 곧 태어날 아이의 환한 웃음에 녹아 없어져버릴 것 같은 행복한 순간들도 기억하고 싶지만, 아이를 내 몸에 품으면서, 낳아 기르면서 내 몸은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감정은 어떠했는지도 기억하고 싶었다.




출산한 지 2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입덧 약통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의 작아진 옷이나 더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은 쉽게 처분하는 내가, 그것은 아직 버린 것일까. 아마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는 아니었을지. 울고, 웃고, 땅 속으로 꺼지기도 했다가 가까스로 땅 위로 올라와 숨 쉴 수 있게 해주었던 그 고마운 존재를. 임신 20주 차까지 내게는 구원과도 같던 그것을 말이다.


아직까지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남겨둔 입덧 약통 덕분에, 그리고 아이가 발견해준 덕분에, 이렇게 뒤늦게라도 글로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 순간을 붙잡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로 남겨두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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