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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니 Jan 23. 2021

조리원 천국은 어디 있는 거죠?

출산하더라도 호르몬 불균형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임신 기간 내 몸 안에 두 개의 심장을 허락하는 유일한 시기이다. 두 개의 심장을 동시에 제대로 뛰게 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어떻게 보면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니까.


임신 중에는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배가 불록 나온다는 표면적인 현상 말고도, 몸 안에서는, 그러니까 이면에는 그보다 훨씬 다채로운 일들이 일어난다. 이 일들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은밀히 진행되는데, 바로 '호르몬 불균형'에 의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호르몬 상태가 불안정하면 신경이 자극되기 쉽고, 이는 육체적/심리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정도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신 전에는 호르몬이 얼마나 사람의 몸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체감하지 못했다. 아팠던 경험이라고는 몸살이 전부였고 수술 경험은 라섹뿐이었다. 호르몬에 의해 내가 좌지우지되어본 적은 전혀 없었다.




대부분의 임산부가 겪는 임신 호르몬으로 인한 증상은 잦은 감정의 변화, 속 쓰림, 메스꺼움, 피부착색, 그리고 어떤 이들은 임신소양증(두드러기/가려움증)을 겪기도 한다. 나는 위의 증상들을 모두 겪었다. 내가 이런 어려움들을 토로할 때, 주변 사람들에게 늘 들었던 말이 있었다.


'임신 호르몬 때문에 그래. 어쩔 수 없어...'


 임신을 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런가 보다...' 했던 마음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증상 앞에서 마냥 뾰족해졌다. '아니 그래서 그 호르몬이라는 게 뭔데. 뭔데 이렇게 나를 가만 못 둬서 안달인 거야.' 당장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 아무런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할 뿐이었다. 뾰족해진 마음은 어디에서도 위로받지 못하고 조용히 칼날만 갈 뿐이었다. 누구라도 한번 잘못 걸리면 단숨에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 몸 안에 '호르몬 리모컨'이 내장되어 있는 듯했다. 리모컨의 버튼이 눌릴 때마다 내 몸은 바삐 움직였다. 어제는 '속 쓰림 모드' 가동. 오늘은 '극심한 무기력 모드'. 내일은 '얼굴 전체와 두피에 왕 뾰루지 모드'. 다음 달에는 '불면증과 피부착색'. 그리고 출산을 앞두고는 '두드러기와 전신에 악성 여드름' 모드 가동! 나는 아무런 손을 쓸 수도 없이 리모컨의 지시에 그대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뒤덮는 악성 여드름이나 피부착색, 컨디션 난조는 그렇다 치고, 임신 후기가 되면서 나를 진짜 괴롭혔던 것은 '임신소양증'이었다. 가슴에 하나 둘 생기던 좁쌀 여드름 같은 점들은 내 몸을 뒤덮었고, 귀에서는 열감이 수시로 올라왔다. 수건을 적셔서 귀에, 목에, 가슴에 번갈아 가며 갖다 댔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나한테 왜 그러느냐고, 제발 정도껏 하라고 소리라도 시원하게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나아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내가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해버리면 뱃속의 아이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이 갈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는지 엄마가 목초액 달인 물을 분무기에 넣어 주었다. 몸이 가려울 때마다 수시로 뿌려보자면서. 나는 이게 소용이 있겠느냐며 툴툴댔지만 한 편으로는 괜히 든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호르몬 때문에 어쩔 수 없다던 다른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엄마는 밤잠을 설쳐가며 고심해서 무언가 내게 건네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치유가 될 리는 없었지만, 적어도 매일 칼을 갈고 있던 내 마음은 더 이상 뾰족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분무기를 손에 쥐고 수시로 뿌려댔다.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가려움증이 올라오려 할 때마다 칙칙칙. 엄마의 목초액 덕분에 그 시기를 잘 지나올 수 있었다. 시시콜콜한 농담도 큰 몫을 했다.


막달 검사를 하러 내원하던 날, 주치의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얼굴이 더 안 됐네요... 조금 있으면 출산하니, 조금만 더 힘내 봅시다. 출산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나는 주치의의 말에서 희망을 보았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되겠구나 하는. 아이만 세상에 나오면 이 모든 것과 안녕할 수 있겠구나.




다행히 무사히 출산했다. 감사하게도 아이는 아픈 곳 하나 없었다. 분만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기 때문에 제왕절개를 할 수도 있다는 마음을 먹었는데, 다행히 자연분만에 성공했다.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는 기쁨과 설렘이 제일 컸지만, 임신 호르몬의 노예로 사는 삶에서 해방된 것에 속이 후련했다. 가능하다면 다시는, 영원히 그 삶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조리원 천국'을 잘 즐기고 오라고 했다. 조리원에 있는 2주 동안 최선을 다해서 잘 먹고 회복에만 힘쓰면 된다고 했다. 무엇보다 많이 자야 한다고도 했다.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그때부터 한동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는 삶이 시작될 테니 말이다.


출산 후 2박 3일의 입원 일정이 끝나고, 나는 아이와 함께 산후 조리원으로 갔다. 출산의 기쁨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갓 태어난 아이의 얼굴에서 나와 남편의 모습을 찾아내기 바빴다. 작은 두상에 오목한 입술은 남편을, 쌍꺼풀이 진한 눈과 코 모양은 나를 닮았다. 나와 남편을 반반씩 닮은 아이가 우리 앞에 있다니! 며칠 전까지는 내 뱃속에 있었던 아이가 이제는 우리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제는 이 작고 소중한 아이를 잘 돌보는 일에만 집중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과 기대는 조리원으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산산이 깨져버렸다. 내 얼굴은 욱신욱신 아팠다. 마치 얼굴에도 심장이 있는 것처럼 두근두근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심한 트러블이 피부를 뚫고 분출했다. 나는 정신없이 여드름 패치를 붙여댔다. 내 얼굴은 여드름 패치로 도배되었고, 패치를 뗄 때마다 고름과 피가 섞여 나왔다. 꼭 화산이 폭발하는 듯했다. 임신 호르몬이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발악하기 시작했다.


전신에는 두드러기가 돋았다. 팔, 배, 등, 허벅지, 엉덩이, 다리. 두드러기는 어느 한 곳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채찍으로 맞은 것만 같은 자국이 몸 위에 그려졌다(볼드모트가 죽음을 먹는 자들의 몸에 새긴 어둠의 표식이 생각나기도 했다). 몸은 심하게 가려워졌다. 내 상태에 '뭔가 문제가 있다'라고 판단하고, 바로 아래층의 주치의 오피스로 갔다.


"간혹 가다가 출산 후에 이런 증상이 있는 사람이 있기도 해요. [......] 쉽게 없어지지는 않아요. 6개월은 갈 거예요."


그 자리에서 울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따지고도 싶었다.

출산만이 답이라면서요. 용기 내서 아이도 잘 낳았는데, 이제는 괜찮아져야 하잖아요. 이제는 좀 괜찮아져야 하는 거잖아요.   


이제 갓 태어난 아이를 두고 몸에 항생제를 투여하거나 독한 약을 쓸 수는 없었다. 모유수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모유수유에만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나를 방해하는 상대의 세력이 너무 거셌다. 간지러움이 너무 심했다. 내 몸 위로 수백 마리의 개미떼가 우글우글 쉴 새 없이 몰려다니는 듯했다.




엄마는 산후조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무조건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고, 찬물도 마시지 말며, 샤워도 자주 하지 말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고생한다고. 몸이 다 망가질 것이라고 했다. 나도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고 싶었다. 아이에게 수유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포근한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서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싶었다. 그렇게 충전된 에너지로 한 없이 아이의 모습을 관찰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두드러기 증상)에는 무조건 몸을 차갑게 해야 한다고 했다. 열감이 올라오면 간지러운 증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기 때문에 수시로 몸의 온도를 떨어뜨려야 한다고 했다. 전신에는 알로에 수딩젤을 덕지덕지 발랐고, 가제손수건을 덧댄 아이스팩으로 온몸을 꾹꾹 눌러댔다. 몸에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옷을 모두 벗고 있어야 할 지경이었다.


11월 중순. 겨울이 코 앞에 있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두꺼워졌지만 나는 홀로 여름이었다. 그것도 심한 혹서기에 어쩔 줄 몰라 모든 옷까지 탈의해 버린 유일한 사람이었다.


뱃속에 있던 아이는 세상에 나왔고, 나는 초보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당장 기저귀 가는 법, 젖병을 물리는 법, 트림시키는 법, 유축하는 법, 모유 수유하는 법 등 배워야 할 것이 쏟아졌다. 내가 가장 걱정되고 두려웠던 것은 모유수유였다. 수시로 몸이 가려워 괴롭다 보니 모유수유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몸에 밀착시키면 체온이 금방 올라간다. 당시의 내 상황에서는 두드러기를 더 자극하고 심해지게 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수유실에 들어갈 때마다 부담감이 몰려왔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아이를 보며 수유할 때만큼은 그 지독했던 가려움을 잊었기 때문이다. 가려움을 잊은 유일한 순간이었다. 모유를 먹이려는 자와 모유를 먹으려는 자. 그 둘이 만나 호흡을 맞추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맞는 자세를 찾아 정교하고 치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아이와 나는 땀을 뻘뻘 흘렸고, 온 힘을 써버린 아기는 금세 쌔근쌔근 잠이 들기도 했다. 자면서도 끊임없이 오물거리는 입. 나는 그 아이를 빤히 내려다보며 머리카락과 귀를 한없이 쓰다듬곤 했다. 아이는 싱긋 웃으며 배냇짓을 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을 보는 데에 온 정신이 팔린 사람 같기도 했다. 나는 내가 조금 전까지 온몸이 가려운 사람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모유수유를 할 때만큼은 내 몸에 평화가 찾아왔다. 나에게 무슨 마법이라도 일어났던 것일까?




조리원을 나와 집에 돌아오고 나서는 매분 매초가 일사불란했다. 아이에게 수시로 젖을 먹여야 했으며, 꼼꼼히 트림을 시키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재우는 일이 무한 반복되었다. 가려움의 정도가 조금은 완화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가 잠든 새벽의 틈에서 나는 혼자 잠들지 못했다. 왜 두드러기는 밤에 유독 큰 목소리를 는지. 어둠을 특히 편애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주치의의 말대로 정말 6개월이 지나니 이 모든 것들에서 해방되었다. 오랜만에 당시를 회상하다 보니 마음이 무겁고 왠지 팔과 다리를 긁적거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임신 중, 그리고 출산 후 6개월. 지독한 호르몬 불균형의 시기였다.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잘 몰랐으니, 조금만 있으면 분명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게 일어날 일들을 모두 알았으면 어땠을까?


감히 말하자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정확히 이 아이를 다시 만나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과정 속에 다시 몸을 던질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나조차도 가늠이 잘 안 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아이의 존재는 그만큼이나 대체 불가능한 것인가 보다. 내가 살면서 다시는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고통도, 아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되풀이할 수도 있는 것. 내 아픔이나 수고로움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것.


내가 구구절절하게 이렇게도 길게 써놓은 나의 힘듦이, 아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마법 말이다.


그리고 아마 나는 이 마법에서 죽을 때까지 해방될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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