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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승 Feb 14. 2024

다시 만난 날

1화

왜 게장 좋아하면서?”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수연은 태호에게 물었다. 궁금해서 묻는 질문은 아니었다. 너에 대해서 아직도 많은 걸 알고 있다고 넌지시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몇 년 만에 만났지만 마치 어제 본 사이처럼 그를 대하고 있었다. 


“응. 사장님이 새우장이 맛있게 됐다고 하셔서.”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음성이었다. 긴 밤 잠 설치게 그리웠던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수연은 속으로 말했다. 워워. 침착해. 긴장하지 마. 아무 말이나 하지 말고. 생각해서 말하자. 제발 수연아.. 애걸복걸하는 뇌를 버려둔 채 입은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여기 자주 오나 봐? 누구랑?”


요놈의 줘 동아리를 내 콱 마! 누구랑은 왜 붙이는데 아. 미치겠다 진짜. 마치 지나가는 개가 짖은 냥, 수연은 말을 해놓고 딴청을 피웠다. 갑자기 일어나 주방까지 가서 음료수를 시켰다. 얼음잔까지 함께. 주문한 콜라가 나오자 두 잔에 천천히 따랐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히 시간을 끌었다. 이 정도면 말 돌려도 되겠지? 안심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요새는 제로콜라가 깔끔하더라고. 마셔봐.”


태호의 손이 콜라잔을 집었다. 마시기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말 돌리기 성공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수연은 콜라를 입으로 가져갔다.


“거래처 사람들이랑 몇 번 왔었어.”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맞다. 기억력 최강인걸 잊고 있었네. 수연의 눈알이 바빠 위아래로 움직였다. 수습을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새우장 비빔밥 두 개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두 사람 앞에 비빔밥이 놓였다. 오 적절한 타이밍! 좋았어. 일단 먹자. 그렇게 넘어가는 거지 뭐. 그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음식을 보자 침샘이 폭발했다. 마구마구 비벼서 꿀떡꿀떡 넘기고 싶었다. 그러나 배를 채울 수는 있어도 맛을 느끼기는 어렵다. 수연은 심호흡을 하며 흥분된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았다.


우선 통통한 간장새우를 숟가락으로 반 토막 냈다. 익히지 않은 노른자에 밥을 비비고 그 위에 새우살을 얹었다. 입을 크게 벌려 한번에 넣었다. 통통히 살이 오른 새우가 입속에서 톡톡 거리며 터졌다. 눈을 살짝 감고 탱글탱글한 육질을 음미했다. 이 적당미! 적당하게 고소하고 적당하게 달짝지근한 그 맛.


여기 먹으러 온 게 아니잖아? 정신 차려! 순간 수연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앞에는 3년 만에 갑자기 연락을 해온 전남편 태호가 있었다. 


그는 얇게 저민 양파에 새우를 섞어 먹고 있었다. 김가루와 통깨도 조심스레 톡톡 뿌렸다. 반숙 프라이는 비빈 밥에 통째로 올려 한입에 삼켰다. 말하려 입을 떼자 입안에서 깨를 볶은 양 고소함이 풍겨왔다.  

 

“네가 맛있어해서 다행이다”


태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리고 따뜻하게 수연을 바라보았다. 먹느라 연신 입을 쌜룩이던 그녀는 그가 밥 먹자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차가웠다. 11월 중순. 늦은 점심을 먹은 그들에게 해는 더 짧아지고 있었다. 수연은 바바리코트의 옷깃을 여미며 최대한 무관심하게 태호의 다음 일정에 대해 물었다. 그는 저녁에 미팅이 있고 그전 까지는 별일 없다고 했다. 습관처럼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연은 난생처음 엄마와 장에 온 아이처럼 태호를 놓치지 않으려 잰걸음을 쳤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니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았다. 거기에 평소 잘 신지도 않는 굽 높은 구두까지 신었다. 무릎은 펴지지도 않고 궁둥이는 뒤로 빠졌다. 뒤뚱대는 제 모습을 보며 수연은 잠시 뒤를 힐끔 거렸다. 오리새끼가 어미인지 알고 따라오는 거 아냐?  여기가 호숫가니? 어이가 없어 피식하고 웃음이 낫다. 초반에만 겨우 태호의 페이스를 맞출 수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뒤 쫓아가는 형국이었다. 주인이 어디 가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졸래졸래 따라가는 강아지 같았다. 여기서 놓칠 순 없지. 삼 년 만에 만났는데. 수연은 기회를 놓칠세라 뜀박질까지 쳤다. 


“그. 으으으 럼. 저. 녁. 까. 지.. 뭐 할 건데?”


숨을 몰아쉬느라 수연의 말이 중간중간 끊어졌다. 


"미안.. 내가 좀 빨리 걸었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만. 이제부터 천천히 걸을게." 


태호가 헐떡이는 수연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였다. 그리고서는 그녀가 좋아할 만한 카페를 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원하는 대답이라도 둘은냥 수연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나 입술을 곧 동그랗게 말았다. 이렇게 하면 안 웃은 것처럼 보이겠지. 낄낄대는 속내를 들킬세라 수연은 억지로 표정을 바꾸었다. 어물쩍 거리는 시늉까지 하고는 카페로 향했다. 


그곳은 전면이 통유리로 외어 안에서 밖이 훤히 보였다. 수연과 태호는 테라스에 반쯤 열린 유리문으로 들어갔다. 오후 햇살을 조명으로 받은 야외좌석들이 좋아 보였다. 카페 입구에는 온갖 종류의 커피원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커피도서관 같았다. 수연은 신이 난 듯 이것저것 구경하기 시작했고, 태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에는 따뜻한 애정이 묻어 나왔다. 주문 대 앞에는 프랑스식 베이커리들과 쿠키들이 즐비해 있었다. 고소한 버터향이 그들을 맴돌았다.


수연은 해가 사라질까 아쉬워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았다. 곧 태호가 카페라테 두 잔을 가져왔다. 예쁜 하트 모양이 사라질까 그는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그는 곧바로 커피를 마시지 않고 창밖을 보았다.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자, 수연은 그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빅뱅이 터진 후 나 홀로 우주에 버려진 유일한 인간처럼 고독해 보였다. 상념에 젖어 보이기도 했고, 가슴에 커다란 돌멩이를 지닌 것처럼 버거워 보이기도 했다. 그 침묵을, 그 고독을 무단히도 깨려고 애썼다. 그녀는 노력의 기억을 애써 지우고자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고소한 우유크림과 커피의 쌉쌀한 맛이 혀끝을 부드럽게 감쌌다. 라테의 부드러움이 용케도 위안이 되었다.


“사실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수연의 귀에는 천둥처럼 들렸다. 그는 마주 앉은 수연 대신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집중된 모습이었다. 수연은 후루룩 후루룩 크게 소리 내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자기쪽으로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함이었다. 삼년을 기다렸다. 삼십년 같았지만 뭐. 이제 다시 왔으니 괜찮다. 뭔들 못 들어 주겠어. 어서 말하렴. 그녀는 그가 얼른 생각에서 빠져 나와 대화를 이어가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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