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끼이이익~ 택시가 빠른 속도로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깜박이는 파란불을 놓칠 세라 수연은 달음질쳤다. 길모퉁이 편의점을 돌았다. 좀만 더 가면 돼. 숨이 가빠왔지만 뜀박질은 멈추지 않았다. 지하철역 근처라 거리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요리 저리 피하고 부딪치기도 하면서 헤어졌던 자리로 겨우 돌아왔다.
후.. 아.. 후.. 아..
수연은 숨을 고르며 곁눈질로 태호를 찾아보았다. 빠르게 걸으며 사람들을 스캔했다. 힘들게 와서는 대강 찾는 식이다. 월리를 찾듯이 눈 까집고 보면 진짜로 만나게 될까 봐서였다.
왜 다시 왔다고 하지?
‘…..’
스스로에게도 할 수 없는 대답을 그에게 어떻게 하려고?
‘…..’
까짓 거 얼굴 보면 떠 오르겠지 뭐.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잖아?
꼭 말을 해야 맛인가?
만나면 그걸로 된 거지.
눈까지 치켜뜨며 수연은 수그러드는 제 자신을 이기려 했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태호의 번호를 눌렀다. 마지막 숫자를 누르려는데 머뭇거려졌다. 끝내는 손가락마저 떨려왔다.
뚜… 뚜…
아.. 잠깐만!
두 번까지만 울리면 아직 수신이 안 들어갔을 테지.
목소리 들으면 감당 안될 것 같아.
그냥 톡으로 하자.
노란색 앱이 켜지고 있었다.
아냐.
보내지 말자 하고 앱을 날려버린다.
보내자 하고 앱을 다시 킨다.
이러기를 수십 번 하는 동안 불현듯 키에르케고르의 명언이 떠올랐다. ‘어차피 인행은 후회다.’ 웬 키에르케고르? 피식 웃음이 났지만 지금 상황에 꽤 어울리는 명언이었다.
보낸다면? 안 보낼걸 후회하겠지. 안 보낸다면? 보내볼걸 후회하겠지. 그럼 뭐든 후회잖아. 자자. 선택을 해보자. 숨을 가다듬고 수연은 생각했다.
어떤 후회가 나을 것인가? 보내고 나서는 되돌릴 수 없다. 그 결과는? 모른다. 안보내서 후회한다면? 그때 보내면 된다. 갑자기 명답이라도 얻은 듯 수연은 무릎을 탁 쳤다. 톡을 보내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찜찜했다. 뭐라고 할지 각이 나오지 않은 탓도 있었다.
태호에게는 늘 일정한 거리감을 있었다. 살을 부비며 살 때조차 수연은 ‘타(他) 자’였다. 그녀는 마음을 나누며 삶을 같이 살아내는 동반자가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는 누군가, 그 대상이었다.
I love you 가 아닌 I love ‘to’ you 였다.
즉, 태호는 수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그녀에게 주는 것이었다. 한수연은 그에게 사랑을 받는 타자였다. 걷어들이면 그만일 뿐인 다른 이에게도 줄 수 있는 그 ‘사랑’을 수연은 받았다. 수연의 ’ 자리‘는 언제나 누군가로 대체 가능했다.
수연은 즉면된 타자로 태호를 마주하기보다는 ‘우리’를 애정했다.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것. 너의 모든 것이 나고 나의 전부는 너다. 나는 너 안의 너고, 너는 내 안의 나다.
서로의 모든 것을 아는, 전부를 공유하는 ‘우리’- 떼어질 수 없는 그 한 덩어리를 사랑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와도 만들어 낼 수 없는 태호와 수연만이 만들어내는 ‘우리’- 그 특별한 관계 자체를 사랑했다.
동상이몽이었던 것일까?
삐. 삐. 삐. 삐. 삐리릭~ 전자음 소리를 내며 수연은 현관에 들어선다. 식탁 위에는 검은색 비닐봉지가 있었다. 혼자서 뭉그러니 외로워 보였다. 외투도 벗지 않고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쳐 앉아 봉지의 매듭을 풀었다.
어제 철길에서 사다 놓았던 다 식어빠진 떡볶이었다. 언제 썼는지도 모르는 양념이 더덕더덕 묻은 젓가락으로 길다락 떡 푹 찔러 입에 넣었다. 혀로 양념을 닦아내고 앞니로 떡을 베어 물며 우물우물 떡을 삼켰다. 떡볶이는 졸깃했던 기력은 잃었지만, 오랜 시간 양념에 불어있어 간이 잘 배어 있었다. 시원하고 달큰한 파 맛이 배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알싸한 마늘 향기가 나는 듯도 했지만, 결국 입안을 맴돌 았던 건 어릴 때 학교 앞에서 먹던 떡볶이의 조미료 맛이었다.
그렇게 밀린 숙제들을 한 번에 처리하듯 봉지를 비워내고, 코트를 벗어 식탁의자에 걸었다. 아... 이제 진짜 겨울이구나... 방안이 냉랭했다. 보일러 스위치를 켰다. 위이이잉 돌아가는 소리를 내더니 곧바로 멈추어 버렸다. 또 배관의 문제일 걸까. 바닥에 앉아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면적을 차지하려는 듯, 양 무릎을 최대한 바짝 당겨 앉았다. 태호와 함께한 겨울은 따뜻했었는데…
———
"아…. 호스가 터졌구나. 이거 갈면 물이 돌아가겠어"
태호가 낡아 터진 호스를 갈아 끼우며 말했다. 자신이 뭔가 쓸모 있는 존재인걸 증명한 듯, 그 의기양양한 말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 검소한 사람이라 불필요한 지출을 하는 걸 싫어했기에, 수리 비용을 굳혀서 기분이 좋은 것도 같았다.
보일러는 주방 뒤편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조그맣게나 있는 부엌 창문으로 그가 보였다. 호스를 갈아 끼느라 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어깨가 저렇게 넓었었나? 왠지 모르게 그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수연은 그에게 한없이 기대고 싶어졌다. 이렇게 사랑받는다면 철밥통이라는 공무원보다 삶이 안정적일 것 같았다. 태호가 평생 저럴까? 인간의 감정보다 간사한 게 있으려고. 가변적인 사랑에 의존하려고? 자기감정에 대한 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머릿속을 비워내고 싶었다.
수연은 서둘러 도마를 꺼냈다. 적당한 과도로 까맣게 익은 아보카도의 배를 가르고, 숟가락으로 볼 같은 씨를 파냈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는 찬물에 담가 두었다. 크기도 모양도 대추를 닮아있었다. 그는 약간 비린듯한 맛이 난다며 토마토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추처럼 달짝지근한 맛이 나는 스테비아 토마토는 괜찮을 것 같았다.
"자 이제 될 거야. 스위치 눌러봐 봐"
패기 있는 말본새와는 달리 꽤나 고생스러웠는지 턱 밑으로 땀이 주욱 흘러내렸다. 수연은 주방 앞치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땀을 눌러 닦았다.
"뭣이 중한디? 어여 이거나 먹어"
핀잔을 주는 듯 말하며 태호를 밀치다시피 식탁의자에 앉혔다. 벌써 세시, 점심때가 한참 지난 그의 뱃속이 요동치고 있었다. 메뉴는 리코타 아보카도 샌드위치.
살짝 구운 깜파뉴에 바질 향이 가득한 페스토를 발랐다. 그 위에는 구름같이 하얗고 몽글몽글한 리코타 치즈를 듬뿍 올렸다. 잘 익은 아보카도를 뭉개지지 않게 얇게 자르고서는 토마토를 반 갈라 그 위에 올렸다.
한 손으로 잡고 성큼성큼 베어 먹는다. 리코타의 진한 우유 풍미에 부드러운 아보카도가 더해 고소한 맛이 배가 되었다. 여기 바질향은 덤이었다. 수연은 태호에게 맛있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토마토에 대해 불평하지만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싶었다. 말없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은 태호는 샌드위치가 헝클어질까 옆 귀퉁이부터 조심스럽게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
수연은 그때 그의 엄마가 된 것 같았다. 아이들이 먹는 모습이 그리도 사랑스럽다는데. 그녀에게는 그의 먹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어떤 때는 스타카토로 아삭아삭 다른 때는 안단테로 호로록, 호로록...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지금, 연주가 다시 시작되는 듯했다. 보름날 부스럼을 깬다며 호두를 먹을 때 났던 소리였나. 오도독~오도독~ 천천히 음률에 맞게 그 리듬은 아다지오로 들려왔다. 수연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갑자기 입꼬리가 내려갔다.
삐리리리… 삐리리리리……
방정맞은 휴대폰 소리 때문이었다. 아 벨소리 좀 바꿔야 하는데. 으이그.. 저 시끄러운 소리. 수연의 얼굴이 일그러져졌다. 언젠가부터 고정된 벨소리는 아무리 재설정을 해도 바뀌어지지 않았다. 행복한 꿈을 꾸다 이웃집 공사소리에 잠이 깨듯, 현실로 돌아온 수연은 짜증이 났다. 이 시간에 누구야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서 빼들었다.
태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