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추운데 잘 들어갔어?”
“으.. 응…”
“아까 연락하려고 했는데 일이 지금 끝나가지고”
“아.. 그랬구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수연의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 뿌옇기만 했다. 예상치 못한 전화라 말문을 이어갈 수 없던 것일까. 어색한 침묵 계속되자 수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가슴까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에 얹었다.
태호가 자신의 손과 맞대보던 손이었다. 끝까지 다 펼쳐도 그의 손바닥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혼잣말로 ‘정말 작다. 조막만 한 손이네’를 중얼거리며 갓 태어난 병아리를 만지듯 부드럽게 손을 쓰다듬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손안에 수연의 손을 넣고 살며시 쥐어 감추었다. '어라 없어졌네? 수연이 너 이제 손 없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가끔은 정말 궁금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근데 ‘이걸로 숟가락도 쥘 수 있어?’ 하며 놀려댔다. 답례로 수연은 주먹도 가능하다며 그에게 면상타를 날렸다. ‘아앗!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 태호는 고개가 꺾기는 시늉을 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불규칙한 숨소리가 수연의 귀에 점점 크게 들려왔다. 곧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어서 말을 해야 하는데…
어릴 적 엄마가 시키는 것을 제대로 못하면 수연은 벌을 받았다. 셀프 음소거. 온종일 말을 못 하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공책에 쓰거나 끙끙대며 신음을 내 의사 표현을 하면 닥치는 대로 맞았다. 매는 주로 주변에 있는 물건이었다. 엄마가 부엌에 있을 땐 국자나 뒤집개였고 현관이나 거실에 있을 때면 구둣주걱이나 파리채일 때도 있었다. 여러 군데 시퍼렇게 멍이 들고서야 어린 수연은 입을 다물었다. 앓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매가 무섭기보다 엄마의 화난 얼굴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까 싶지만, 어른이 된 뒤에도 상흔으로 남아있었다. 침묵은 형벌이었다. 대화가 없으면 늘 불안했다. 음소거가 시작되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참을 수가 없었다. 벌서는 기분 아니면 매 맞기 전 긴장감을 느꼈다. 상대가 누구든지 상관없었다. 말이 없는 상대방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였다. 이미 화가 났거나 곧 화를 낼 것 같았다. 그것도 제 탓으로 느껴졌다. 내가 빨리 와서 그런가? 여기가 마음에 안 드나? 나한테 서운한일이 있었나?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차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침묵에 합리적 이유는 없었다.
결국 스스로 입을 열어 재잘댔다. 그렇게 마음속의 불안을 달랬다. 가벼운 가십거리가 떠들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치나 종교처럼 호불호가 별로 없는 게 좋았다. 중국으로 돌아간 푸바오나 변덕스러운 날씨 같은 것도 괜찮은 주제였다. 입운동을 시작하면 몇십 분은 그냥 흘러갔다.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기 보다 정보를 교환하는 가벼운 대화가 더 편했다.
갑자기 시끄러운 바깥소리가 들렸다. 태호가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여러 소음들이 뒤엉켜 들려왔다. 전화기안으로 들어온 소음은 대화 속 수연의 빈칸들을 하나둘씩 채우며 그녀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침묵을 견디고 있을 그녀를 위한 태호의 배려였다.
"있잖아…"
태호의 나지막한 음성이 통화 속 적요를 부드럽게 깨뜨렸다.
"응.."
"이번 계약 성사될 것 같아. 지금까지 맡았던 거래처 중 제일 큰 데야."
수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마치 수연이 상사라도 되는 듯 자기가 어디서 뭘 했는지 매일 같이 꼭 보고하던 예전의 버릇이 떠올랐다.
"그래…”
따뜻한 입매에서 나오는 말은 차가웠다. 아랫입술을 약간 깨문 수연의 입은 마음을 배신하려 애썼다. 그래 잘 되었구나 에서 ‘잘'은 입술을 깨물 때 잘근 잘려나갔다. 그것은 너 혼자 만의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약간 격양되어 보이는 그의 기분에 공감해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감정의 공유는 내밀한 관계에서 하는 것이지 끊어진 사람들끼리 해서는 안될 금기였다. 차인 주제에 이 정도는 지키고 싶은 수연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뚜… 뚜... 뚜… 어.. 전화 들어온다. 나중에 다시 할게."
어색한 전화는 예기치 않게 끊어져 버렸다. 나중에? 언제? 다시 전화해서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왜 본론은 이야기 안 하냐고? 지금 거래처 일이 문제가 아니잖아. 아까 하고 싶었던 말, 삼 년 만에 만나서 꼭 얼굴 보면서 해야 했던 말, 그 말이 대관절 도대체 뭐였냐고? 그놈의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나지막이 중얼거리듯 시작한 ‘나중에’는 점점 데시벨이 올라가 결국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수연은 나중에라는 단어에 시니컬했다. 나중에 밥 한 번 먹자. 나중에 뭐 하자. 나중에 어디 가자.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다 거짓말. 면전에 대고 도대체 언제? 되묻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가벼운 인사치레나 습관일지 몰라도 수연에게는 기다림이었고, 결국에 그 기대는 실망으로 귀결되었다. 별말도 아니고 일상적으로 묻는 의미 없는 말에 예민하다고? 신경과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수연에게 정신과 의사들이 그렇게 말했다. 예측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증이라고 했다. 가끔 가슴도 두근두근 하고 머릿속이 하얘지죠? 심하면 공황장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약을 복용을 하라는 그들의 협박성 멘트 아니 영업에 수연은 넘어가고 있었다.
여덟 시, 수연은 늦은 저녁을 위해 가스 불을 켰다. 따닥하며 가스가 점화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네 파란 불이 번쩍하고 올라왔다. 스테인리스 냄비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수연은 물에 비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중에를 기대하고 나중에 또 실망할 걸 두려워하는 여자. 삼 년 만에 밥 먹고 통화했으면서 또 나중에야... 하긴 십 분 후도 나중이지.. 십 년 뒤도 나중이고. 끓는 물에 헝클어져버린 여자를 보며 수연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진다. 와락 물을 버린다. 형체 없는 여자는 배수구 안으로 뜨겁게 사라지고야 만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진 듯 수연은 흐느적거리며 식탁에 엎드렸다. 차가운 유리에 얼굴이 서늘해졌다. 옆으로 가늘게 뜬 눈으로 구석에 놓인 하얀 종이봉투가 들어왔다. 한 손으로 꿈틀대며 봉투를 열었다. 피칸과 호두 그리고 초콜릿이 큼지막하게 박힌 르뱅쿠키였다.
엄지와 중지로 옆귀퉁이를 부러뜨려본다. 쿠키 덩어리는 갈라지는 순간에도 꽤나 촉촉한지 부스러지지 않고 깔끔하게 뜯어졌다. 이빨로 쿠키를 끊자 다크 초콜릿의 쌉싸름함이 입안을 밀고 들어왔다. 어금니로 피칸을 바삭하고 부순다. 고소한 호두의 향이 입안에 퍼졌다. 달달함은 불안을 이기는 것일까. 수연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띵동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 카메라를 통해 밖을 내다봤다.
이 시간에 누구지?
-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