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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승 Apr 17. 2024

울어도 보고 빌어도 보고

10화


이 말까지는 안 하려 했었다. 태호가 고개라도 한번 끄떡한다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수연은 더 이상 불쾌한 긴장감을 견딜 수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매 맞는 줄 가장 끝에선 것 같았다. 한발 한발 자기 차례가 가까이 올 때마다 손발이 더 떨려왔던 그 긴장감. 어차피 맞을 건데 빨리 맞아버리자. 매 맞는 때를 기다리는 건 또 다른 고문이니.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 한방에 끝내려 그 질문을 한 것이었다.


태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수연은 태호를 처음 본 때가 떠올랐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 때였다. 풋풋한 봄내음이 나는 잔디밭에 모든 학과생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당시 3학년으로 과 학생회장이었던 태호가 먼저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


훤칠한 키에 찰랑거리는 머릿결. 반달로 휘어지는 무쌍의 부드러운 눈매. 반듯한 코. 똑떨어지는 입 매무새. 피부마저 봄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만찢남? 순정만화를 찢고 온 남자가 내 눈앞에 있다니! 수연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런 그녀에게 소개를 마친 태호가 찡끗 미소를 보내왔다. 수연은 가슴이 덜렁거려 어버버 거리며 자기소개를 겨우 마쳤다. 그렇게 그가 내 안에 들어온 지 십 년이었다.


그 십 년을 매일같이 태호를 생각하며 행복했었는데. 나에게 그걸 뺏겠다고?


그의 침묵을 이별로 받아들인 수연은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지하철 바닥의 차가운 한기가 올라오는 것도 힐끔 거리던 승객들이 이제 대놓고 쳐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줄줄 떨어지는 눈물에도 눈동자만큼은 태호를 향해 있었다. 그는 그런 수연을 무심하게 한번 쳐다보더니, 휙 돌아 출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태호가 시야에서 안 보이기 시작할 즈음, 수연은 벌떡 일어나 그가 간 방향 쪽으로 달려갔다. 이네 출구 밖으로 나가니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그가 보였다. 수연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달려갔다. 마침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턱 밑까지 흘러내린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예전처럼 사랑해 달라고 안 할게.. 그냥 헤어만 지지말자..”


수연의 목소리가 눈물에 젖어 있었다.


“내가 잘하면 되잖아. 태호 씨가 싫어하는 거 내가 다 고칠게. 이번에는 내가 정말 잘할게.


“…..”


“알잖아. 나 노력하면 잘하는 거. 저번에 보일러 온도 맞추는 것도 태호 씨가 알려주고 한 번도 틀리지 않았어. “


태호는 냉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그의 팔에 매달리고 있는 수연을 단호히 떼어냈다.


“나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내가 두 번 봐달라고 안 할게. 이번 한 번만 봐주면 돼. 그럼 진짜 태호 씨가 바라는 그런 여자가 될게.


수연은 눈물이 범벅인 채로 태호를 쫓아가며 울먹였다. 분한데 슬펐다. 무엇보다도 지금이 아니면 그를 다신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가버리면 우리 사이는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 그렇게 만들고 싶어?”


이제 협박조로 말을 바꾸었다.


“집에서 키우던 개도 이렇게는 안 버릴 거야. 그런 사람아니 잖아?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건가? 그런 사람이었어?”


씩씩거리며 거칠게 태호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눈물은 턱 끝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울잖아. 아니 내가 이렇게 울면서 빌잖아. 오빠가 제일 싫어하는 게 내가 우는 거 불행한 거라며. 근데 오빠가 지금 나를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게,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고. 이런 거 싫다고 했잖아? 그럼 안 해야 하자나. 지금 여기서 아까 했던 말 다 취소하자. 그럼 내가 싹 잊고 다 없던 일로 할게”


손바닥으로 볼에 흐르는 눈물도 싹싹 훔쳐냈다. 오빠라고 부른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소리에 약한 태호니까.


“나 오늘 일 다 잊고, 진짜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고, 평생 언급도 안 할게. 그러니까 제발.”


수연은 손바닥을 마주한 체 빌었다.


울고 불고 이제 빌기까지.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 하는 분한 마음이 올라왔다. 응 이렇게 까지 해야 해.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의 내면에서 들려왔다. 나중에 이 순간을 돌이켜 볼 때 최선을 다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그 보다 더 할 수는 없었다. 이 생각이 들 수 있게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해. 수연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태호는 엉망이 된 수연을 쳐다보았다.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몸을 돌려 성큼성큼 다시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에 걸음도 빠르고 키가 큰 그를 수연이 따라잡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크리스마스라고 오랜만에 하이힐을 신은 탓도 있었다.


수연은 뒤뚱거리며 태호를 쫓아갔다. 발목이 꺾이고 무릎이 구부려졌지만 상관치 않았다. 서둘러 카드를 찍고 역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 쪽으로나 무조건 빨리 내려갔다. 다행히 맞은편에 그가 보였다. 수연은 손을 흔들며 거기 있으라고 신호를 주고서는 재빨리 다시 올라갔다. 그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지금 들어오고 있는 열차는 신도림행, 신도림행 열차입니다…. “




-11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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