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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승 Apr 24. 2024

죽지 않아

11화

열차는 태호를 싣고 무심히 떠나가 버렸다.

우리의 이별은, 아니 그의 이별은 그렇게 갑작스러웠다.


삶이 와르르 무너저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의 사랑이 키운 수연의 자기 존중감은 산산이 조각났다. 얇은 유리조각 밟은것 처럼. 사랑받는 대상을 자기 존재로 삼았다. 태호가 있어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았다. 그와의 관계를 통해  삶의 주인공이 되었다.  


며칠을 씻지 않은 수연에게 다가가 냄새가 좋다며 킁킁거리던  태호.

회사 프레젠테이션이라도 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주고 손뼉 쳐주면서 응원해 주던 태호.

떡볶이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전국의 떡볶이 맛집 지도를 직접 그렸던 태호.

어딜 가도 누굴 만나도 무엇을 해도 태호에겐 수연이 먼저였다. ‘내 인생의 목표는 너랑 행복하게 사는 거야. 네가 제일 중요해’ 수연이 아픈 날에는 중요한 회사 일이 있어도 나가지 않았던 태호.

십 년동안 수연에게 짜증한번 내지 않았던 태호.

매일 밤 사랑한다고 너랑 함께해서 행복하다고 말하며 잠에 들었던 태호.

물병을 따고, 출입문을 열고, 어디 가서 주문을 하고, 신발 끈을 매고, 핸드백을 드는 사소한 것조차 해주고 싶어 했던 그였다. 수연에게는 슈퍼맨이 되고 싶다던 태호.


만성우울증 앓던 그가 수연 앞에서만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내 세상은 너야. 너는 내 빛이야.눈을 빛내며 말했다. 수연은 이 남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면, 나도 저 사랑받을 수 있을 않을까. 사랑은 쌍방이니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다.


보육원에서 자라 부모정도 모르겠네. 동정 섞인 비웃음도 안녕이었다. 조실부모한 수연은 내적 결핍을 채울수 있었다. 다섯살 때 투자실패로 자살한 아버지. 얼굴 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속에는 자욱한 담배연기가 스쳐지나갈 뿐 이었다. 그 후 엄마는 밤마다 화장을 짙게하고 나갔다. 매일같이 술에 취해 들아오더니 어느날 부터인가 오지 않았다. 잦은 짜증과 꾸지람 그리고 화장품 냄새가 엄마와의 기억 전부였다. 왜 나를 버렸을까 하는 답할 수도 없는 비참한 질문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미도 버린 새끼라는 자괴감은 성인이 되서도 마음속을 머물렀다.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하지만 괜찮다! 어버이보다 큰 사랑 받을 테니까. 수연의 인생은 태호와의 결혼으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십년간은 남 부럽지 않게 행복했었다. 사랑받는 여자. 그 자격있는 여자. 그게 나 한수연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랑을 잃어버렸다. 아니 또 버림 받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귀가 멍멍대고 가슴이 먹먹하고 다리가 풀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비실 대던 수연의 앞에 지하철이 도착했다. 얼떨결에 사람들에게 밀려 열차에 올랐다. 키가 작은 그녀는 사람 벽에 둘러싸였다. 움직이는 열차를 따라 몸이 흔들렸다.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겨우 손잡이를 움켜잡아 간신히 쓰러지는 걸 모면했다.


어디로 가는 열차일까. 곧 출발한다고 하니 어디로든 가겠지. 차창 밖으로는 검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반대로 강에 비춰진 도시 모습은 트리 때문에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꼭 제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한껏 꾸민 겉모습 안에는 시커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수연은 출입문 쪽에 서있었다. 뒤에서 내리려는 사람들에 떠밀려 열차에서 내려졌다. 밤시간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지.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승객들은 수연의 여기저기 밀치고 지나 갔다. 그녀의 슬픔도 밀쳐졌다. 이리 저리 밀쳐져서 슬픔의 파도 안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잠시 파도가 멈출 때는 잔잔한 아픔이 고요하게 일렁거렸다.


나온 곳은 성수역이었다. 들뜬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트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대부분 연인이었다. 아 크리스마스이브였지. 저 사람들처럼 나도 그와 함께 이브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없다. 감당할 수 없는 혼자 남은 시간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락을 할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핸드폰을 켰다. 새로운 추억이 있습니다! 애플시스템은 친절히 일 년 전 사진을 보여주었다. 트리 앞에서 태호와 입맞춤하는 모습이었다. 짙은 한숨이 나왔다. 핸드폰을 꺼버렸다.


길을 잃은 것 같았다. 한국에 처음 온 사람 같았다. 모든 게 낯설었다. 그렇다고 마냥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집으로 가야 할까. 싫었다. 사진 한 장으로도 추억이 되살아났다. 집으로 간다면 슬픔의 쓰나미가 몰려올 것이었다. 모든게 그였다. 냄새까지도.


헤어짐을 상상해 본적이 있었다.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꼭 잡고 산책을 하는 노부부를 보며 나중에 우리 모습이겠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었다. 꿈꾸었던 시간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혼자만의 시간이 무한대로 이어질 것이다. 빅뱅이 터져 버렸을 그 태초의 우주에 홀로였다.


얼굴에 난 눈물 자국을 손바닥으로 지워냈다. 아무 카페에나 씩씩한척 들어갔다. 우유 거품이 몽글몽글하게 올라온 카푸치노를 시켰다. 그가 싫어하던 것이기에. 깔끔한 성격의 그는 거품이 입술에 묻는 걸 싫어했다. 그의 취향과 반대로 하면 그리워지지 않을 것이다. 성급하게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카푸치노가 나오자마자 거품을 입술에 왕창 묻혔다.  찐득찐득해 일부러 닦아내지 않은 한 떨어지지 않을 듯했다. 그가 싫어했겠다. 참 다행이었다. 입술이 씰룩거렸지만 그 언저리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죽지 않아'


일그러진 우유거품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12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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