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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승 Apr 10. 2024

이제 나 사랑하지 않아?

9화


앙칼진 목소리를 꾸며낸 수연의 인상이 구겨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호가 슬며시 턱을 들었다. 눈은 여전히 내리깔고 있었다. 수연은 그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땅바닥에 누워 얘기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을 쳐다봐 줄 것 같았다. 지하철이 몇 번이나 들어오고 나가고 승객들이 수십 명씩 들락날락하는 동안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돌부처라도 된 양 숨소리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 답답해 미칠 것 같아. 도대체 왜 그러는데?”


수연이 주먹을 쥔 채 제 가슴을 마구 두들겼다. 그녀의 목소리가 개찰구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성대에 확성기라도 꽂은 것 같았다. 태호가 귀라도 먹은 건가 싶어 목청껏 내질렀다. 승객들은 힐끔거리며 수군댔다. 태호는 그제야 수연을 쳐다봤다


“그, 냥... 일이 그렇게 된 거야. 그러니까… ”


태호는 말을 어물거렸다.


“내가 요새 좀 부주의해서 그래? 방 불 잘 안 끄고, 창문 꼭꼭 안 닫아서?"


“아니야..”


“그럼 불안증 약 먹는 거 때문에? 그거 먹는 거 안 내켜했잖아. 의사가 하도 권유하니까 함 먹어본 거야. 이제 안 먹을게. “


셀프 화답을 하며 수연은 급한 성미에 결론을 빨리 내려고 하고 있었다. 문제는 나한테 있고 내가 이걸 해결할 수 있다. 그러니까 너는 이럴 필요 없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언제나 누구한테나 그랬듯이, 모든 문제는 제게 있었다. 일종의 습관이랄까. 상대방은 바꿀 수 없으니까. 제게 문제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떻게 보면 자기 과신인 줄도 모른 채.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호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 뭔데? 밤에 늦게까지 잠 안 자는 거?”


태호는 침묵으로 답했다. 수연은 그가 대화에서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할 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잠 안 와도 일찍 불 끄고 옆에 누워 있을게. 부스럭 소리도 안 낼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괜찮아.”


그의 자상한 대답에 수연의 굳은 얼굴이 풀렸다. 이제 됐다. 헤어지자는 건 아니구나. 수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부터 본가로 들어갈 거야. 미국 갈 때까지”.


뭐??????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수연의 귀에서는 이명이 들려왔다. 삐이이이 이 이이 이~ 계속되는 소리에 정신이 멍해지고 있었다.


두 시간 전 내 손은 따뜻하게 잡아주던 그 사람이 맞나? 내가 아침에 다려준 셔츠를 입고 있는 태호 맞나?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집에 가면 빨려고 넣어둔 그의 양말들이 세탁기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태호의 성격을 볼 때 이미 결정한 일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수연은 말을 이어갔다. 이말 저말 하다 보면 어찌 되었든 뭐라도 나오게 되어있으니까.


“그래서 평소에는 먹지도 않는 와인이랑 스테이크 사준 거야?


약간은 뜸을 들이고 나서 태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끝맺음을 잘하고 싶었어. 마지막이 제일 오래 기억나는 법이니까.”


“태호 씨. 알자나. 나 노력한 거 알자나.”


수연의 음성에는 애처로움이 묻어 나왔다. 논리가 안된다면 감정에라도 호소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알아. 아니까 그래. 불 안 끄면 멀리 갔다가도 후다닥 돌아와서 끄고, 약 안 먹는 척하느라 나 자고 나면 일어나서 먹는 것도 알아. 이제 알았어. 네가 나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는 걸. 널 불편하게 한다는 걸 알았어.”


“?!!!”


이게 뭔 소리야? 도대체 왜 저러지? 뭐 잘못 먹었나? 스테이크에 약이라도 탄 거 아냐? 이런 억지 춘향이가 어디 있어? 수연은 기가 차서 할 말이 없었다. 뭐? 네가 나 때문에 자유롭지 않아? 지나가는 개가 웃을 말인데. 푸하하 하하하하하!!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수연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갑자기 왜 저래? 네가 개소리를 하니 나도 멍멍하는 수밖에.


“날 위해서라면 이럴 필요 없어. 난 자유롭고 싶지 않아. 태호 씨랑 함께 있을 때 행복해. 이 정도 구속은 나 견딜 수 있어. 아니 구속이 아니라 배려라고 할게. “


수연은 되지도 않은 억지를 부렸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말은 더 이상 공동체 소통을 위한 약속의 기호가 아니었다. 태호만을 위한 설득의 기표였다. 다른 사람들 뿐 아니라 수연 자신이 들어도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가 설득된다면 말 자체의 비논리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의 말에 빠져있던 수연을 깨운 건 그의 굳은 목소리였다.


“지금 당장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너도 내 선택이 낫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굳은 확신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수연은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을 끝으로 태호는 표 판매기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이제 대화는 끝이구나. 이대로 그가 출구 쪽으로 나간다면 우리 관계도 끝이구나. 이별의 두려움이 수연을 엄습해 왔다. 이렇게 버림받을 순 없어. 아니 ‘우리’가 이렇게 끝나버릴 수는 없어. 세상에 이런 법은 없는 거야. 수연은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 냈다. 입술을 앙 다물고,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이제 나 사랑하지 않아?"










- 10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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