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희승 Mar 27. 2024

의심의 씨앗

7화

선미????


수연은 동공 지진을 잠재우려 두 눈을 깜박거렸다.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촉촉한 눈가를 보니 급기야 쓰나미까지 덮쳐올 듯 보였다. 서둘러 코를 풀어 그 덕에 눈물이 나온척 휴지로 닦아 냈다. 애먼 곱창도 질겅댔다. 한참을 씹다 무심한 척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 앞에 촛불같았다.


“선미? 처음 듣는 이름인데? “


수연의 질문에 지혜가 싱긋 웃었다. 웃음을 보자 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 언니는 잘 모르겠다.  선미가 아마 11학번으로 편입했어. 3학년으로 들어와서 전공부터 들으니 힘들었나 봐. 겁나 야침차기도 하지. 전문대에서 왔으면 거의 못 알아듣는 거 아냐? 수준 차이가 좀 나야지. 암튼 그래서 일 년 꿇었잖아. 2학년 전공기초부터 시작했을걸. 그러니 언니랑은 수업 겹치는 게 없었을 거야. 게다가 공부에 집중하고 싶다고 학생회니, 동아리니 얼씬도 안 했으니 들어 본 적도 없을 듯. “


재미난 얘기라도 해주는 냥 지혜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그리고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나도 실은 잘 몰라. 관리회계인가 재수강할 때 팀플 같이 했어. 그것도 딱 한번. 그 이후로는 말해본 적 거의 없을 걸?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지 뭐. 10학번 학생회장 이지수는 알지? 걔랑은 꽤 친한가 보더라고. 하긴 그 오지라퍼가 편입생이라고 쫓아다니면서 챙겨줬을 거야. 안 봐도 비디오지. 근데 이지수랑 나랑 저번 흥국생명같이 다녔잖아. 걘 인사팀. 난 재무팀. 그래서 지수랑 좀 친해져서 선미도 건너 건너 알게 됐지. 이번 직장에서도…"


“그래서 태호선배랑 선미가 무슨 사인데?”


수연이 지혜의 말 허리를 잘랐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른 물어보고 싶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인내심 따윌 챙길 여력이 없었다.


이제야 포커페이스를 버리는구나. 지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뭔가 이긴 기분이었다. 그럼 그렇지. 고매한 척 언제까지 하나 두고 볼랬더니. 의외로 백기를 빨리 드시네. 그렇다면 또 조금 알려드려야지. 이걸 보려 거금 삼만 원까지 들여탕수육에 간짜장까지 사들고 온 거 아니겠어. 흐흐.. 고개를 숙이고 소주를 한 컵 더 따랐다. 어디까지 말해줄까 생각도 해야 했지만, 당장은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남편 바람나 버려진 한수연. 훗!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셨네. 좋다 좋아! 나만 보기 아까운데..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야 하는 건가. 황새가 좋다니 얼씨구나 만났겠지. 결국 뱁새 다리만 찢어졌네. 저 나이에 이혼녀라니. 재취자리나 알아봐야지 뭐. 남의 자식까지 키워준데도 누가 데려갈까 뭘라. 저 씹다 버린 껌을… 단물 다 빠져 질기기만 할 거다. 쯧. 쯧..


입속으로 혀를 차던 지혜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몇 해 전 박은어금니 임플란트가 신경 쓰였다. 병원서는 잘 됐다는데 여전히 뭔가 낯설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부러움에 열폭하느라 소주에 오징어다리를 씹어대지 않았을 텐데. 지혜는 제불행이 다 한수연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저게 쟤 분수만 지켰어도. 어쩌면 태호는 제 차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코딱지만 한 원룸에 쥐꼬리만 한 월급 받으며 아등바등 이렇게는 안 살았겠지. 기백만 원짜리 유모차를 끌고 명품관을 제집 드나들 듯했겠지. 남 보란 듯이 여유롭게 살았을 텐데.. 후 하고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가슴속 응어리를 비우려 함이었다.


“지수는 모를걸? 그냥 몇 번 봤대. 회사 밑 커피숍에서 태호선배랑 선미랑 만나는 거.  지수회사랑 선배 회사가 같은 동네잖아. 저기 을지로 쪽. 둘이서 무슨 얘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쏙딱 쏙딱”


지혜는 수연의 귀에 대고 직접 쏙닥이면서 현장감을 드러내려 애썼다.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둘 사이가 묘해 보여서 말도 못 붙였다나 봐. 한참 전에 들은 얘긴데 이제야 얘기하네. 까먹었나 봐. 아휴~ 이놈의 기억력. 오늘도 회사에서 까마귀 고기 먹었냐고 깨졌는데. 큰일이네. 메모큐라고 기억력 좋아지는 비타민이 있다던데. 그거라도 먹어볼까?"


의심의 불씨를 심었다. 지혜는 새삼 기분이 좋았다. 헤헤거릴까 싶어 들썩이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썼다.


묘한 사이? 수연의 가슴이 죄어오기 시작했다. 선미라는 여자를 알았다면 그리 힘들지 않았을 텐데…  지난 일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삼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수연은 하품을 하며 자판기 앞에 섰다. 잠 오는 오후시간을 버티려 밀크커피 버튼을 눌렀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태호였다. 의아했다. 업무시간에는 주로 톡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오늘 좀 일찍 나올 수 있지? 이브잖아. “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태호가 흥흥거리며 물었다. 기분 좋을 때 내는 그의 버릇이었다.


“안타깝습네다. 위대하고 또 위대하신 국장님께서 독실한 불교신자이시니. 내래 정시 퇴근이디요.“


그가 재미있어하는 말투로 수연은 대답을 했다. 이른 퇴근을기대했을 그의 실망감을 보듬고자 함이었다.


“하하.. 하하하..”


웃음끼 담은 태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옛 기억이 수연의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언젠가 태호는 수연이 만든 평양냉면을 맛있어하며 물었다. 고향이 어딥니까? 내래 물 좋고 빛고은 대동강 아래 옥류관 출신입네다. 너무 재밌다며 태호는 귀까지 벌게지며 웃었다. 그 후, 수연은 가끔 그에게 웃음을 주고 싶을때 이북 사투리를 써왔다.


“그럼 저녁먹어야겠네. 내가 퇴근하고 너네 회사 앞으로 갈께. 어디갈까?“

“글쎄, 이브라 어디든 사람 많을 것 같은데.. “

“뭐 먹고 싶은 건? 가고 싶은네는 없어? “

“음..잘 모르겠다. 마감이 코앞이라 생각이 잘 안나..”

“그래, 그럼 내가 근사한 집으로 예약해 둘께. 이따 봐. 아 참! 중간에 가고 싶은데 생기면 언제든 톡 해”


전화를 끊은 수연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기념일이 나 특별한 날을 챙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게 의문스러웠다. 심지어 본인 생일도 카드회사의 문자를 보고 아는 사람인데… 갑자기 이브에 근사한 저녁이라니. 뭔가 낯설음이 밀려들어왔다. 고개를 저어 애써 불안감을 지웠다.


- 8편에 계속-


이전 06화 전남편의 내연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