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비극
8화
“눈이다”
누군가의 외마디가 적요를 깨뜨렸다. 수연은 맞은편 창문을 바라보았다. 눈이 오고 있었다. 통화를 마친 오후 세시만 해도 하늘은 여느 겨울처럼 높고 파랬었다. 한두 시간 만에 도시는 흰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하이얀 눈 꽃송이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벌써 눈이 쌓였는지 이글루처럼 변한 차들이 느림보 걸음으로 도로를 채우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았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다. 십 년 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둥. 오늘 고백하면 승률 100%라는 둥. 단지 얼음 결정체가 떨어질 뿐인데도 회사원들은 각자의 로맨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수연도 십 년 전 일을 떠 올렸다. 태호가 동아리 행사 포스터를 붙이자고 제안했다. 학술국장씩이나 되는 나에게 신입생이나 할법한 '허드렛일'을 하자고 하다니. 크리스마스 이브에. 뻔한 핑계가 귀여워 단박에 승낙했다. 그날도 눈이 왔었는데… 첫눈이었다. 첫 데이트. 첫 고백. 첫 키스. 첫사랑…. 로맨틱 영화의 정석이 있다면 그날이었을 것이었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수연과 태호는 샤베트처럼 서로에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수연은 쌓여만 가는 눈을 보고 있었다. 아까의 불안을 잊은 걸까. 태호와 뭘 먹을지를 상상하며 슬쩍 광대를 올렸다. 언젠가 눈 오는 날 태호는 수연에게 눈사람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 반나절을 연탄재를 구하려다가 허탕 쳤다. 실망할까 돌멩이를 넣은 미니 스노우 맨을 만들었다. 방수도 안 되는 장갑으로 몇 시간을 공들였다. 결국 손이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동상에 걸린 것이었다. 며칠은 숟가락도 못 들정도로 고생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떠오른 수연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올해는 전망 좋은 데 가서 경치나 구경할까? 아님 유치하지고 뒤끝 있는 눈싸움을 걸어볼까? 즐거운 상상을 하던 수연은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회사로비로 내려갔다.
태호의 머리카락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눈이 녹아 물이 되었으니, 기다린 지 꽤 듯했다. 수연을 보자 반가운 듯 미소를 지었다. 가는 고운 말, 오는 홍두깨라고 수연은 성질을 부렸다. 아니 왔으면 톡을 했어야지. 우산이 사무실에 없었어?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하나 사던가. 수연의 높은 언성이 주의의 시선을 끌었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평소 회사 사람들을 신경 쓰는 모습과는 달랐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해.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손에 물 닿으면 추워. 태호는 손수건을 꺼내 물기가 있는 수연의 손을 닦았다. 그리고는 제 손을 크게 펼쳐 그 안에 그녀의 손을 넣었다. 그의 커다란 손에 폭 안겼다. 태호는 감싸 쥔 손을 제 코트 주머니에 넣고 회사 밖을 나섰다. 자기 전 태호가 품어줄 때처럼 수연은 온몸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걸어가는 내내 그는 즐거워 보였다. 좋은 일이 있나 수연도 덩달아 마음이 부풀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자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겼다. 삼십 년 되었다더니 실내는 연식이 오래된 분위기를 풍겼다. 그에 걸맞게 검정조끼에 나비넥타이까지 맨 웨이터가 예약된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태호가 미리 메뉴를 예약해 두어서인지, 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웨이터는 와인 테스팅을 시작했다. 스테이크 전문점답게 고기에 잘 어울리는 레드 와인이었다. 수연은 와인 잔을 빙빙 돌렸다. 공기에 산화된 와인을 살짝 맛보았다. 산미가 낮고 드라이했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어니언스프에 한 두 모금 곁들였다. 곧 스테이크가 나왔다. 수연의 식성에 맞춘 미디엄 레어였다. 육즙이 살아있어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평소 태호는 술을 즐기지 않았다. 웬일로 와인을 시켰을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표정 때문이었다. 할 말이 있을 때는 진지한 얼굴이 나왔다. 지금이 딱 진지 모드였다. 성질 급한 수연이 먼저 말을 꺼낼까 했지만,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었다. 수연은 그냥 그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결국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촉촉한 티라미수가 입안에서 녹아 없어질 때까지.
밖으로 나왔다. 눈은 먿었지만 바람은 매섭게 불었다. 수연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추웠다. 눈길이 위험해 차를 두고 왔다며 태호는 지하철을 타고 가자고 했다. 둘은 역으로 걸어갔다. 수연은 갑자기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추운데 손도 안 잡아줘서 그럴까? 아니면 굳은 표정 때문일까? 괜한 생각하지 말자. 고개를 흔들어 머리를 비울 때쯤 개찰구에 도착했다. 태호가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미국 가기로 확정 났어”
이 얘기를 지금? 이제까지 뭐 하다가? 수연은 이런 말들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반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엔비디아? 이야 잘 됐다. 이제 진짜 AI 할 수 있네.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로봇 만드는 게 꿈이었잖아. 참, 일정은 나왔고? 나 연차 붙이면은 이주는 괜찮아. 가는 김에 저번에 말했던….”
“같이는 못 갈 것 같아...”
태호가 말 허리를 잘랐다. 수연의 머리가 꺼버린 기계처럼 멈췄다.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비좁은 개찰구가 붐비기 시작했다. 승객들에게 이리저리 치히면서도 수연의 정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왜 여기 서있고 그래요!!"
한 승객이 그녀를 확 밀치며 위아래로 흘겼다. 그제야 겨우 비켜섰다.
“그게.. 계약이 아니고 일하러 가는 거여서. 몇 년 있어야 될 것 같아. 혼자 갔다 올게”
그의 목소리는 일상적이고 평온했다. 수연에게는 편의점에 들렀다 집에 간다는 말처럼 들렸다. 어안이 벙벙해지고 있었다.
“다음은 2호선. 2호선 순환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수연은 비스듬히 서 있는 태호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며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혼자 가는 이유가 있어? “
“같이 살기 전부터 오퍼 받은 일이었잖아. 회사 비자로 가는 건데. 두 명 다 비자 발급도 어렵고, 외국 생활도 너에겐 힘든 일이야. 게다가 내가 가는 쪽은 날씨도 우중충하고 한국사람들도 별로 없고 너 회사도 그만둬야 하고…"
평소 논리에 비약이 없던 그였지만, 오늘은 허점 투성이었다.
주재원으로 가니 가족 비자 나오는 거야 당연하고. 미국 생활이 뭐가 어려워. 어릴 때도 오하이오에서 잘 만 살았구먼. 게다가 시애틀도 아니고 캘리포니아 날씨가 우중충하다고? 한국 사람들이 없다고? 남부에서 제일 큰 코리안 타운이 산타바바라인데? 회사를 누가 그만 둔대? 휴가 내고 가기로 다 이야기된 거였잖아. 수연은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반박을 하고 있었다.
“지금 헤어지자는 거야?”
그러나 입에서는 불쑥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