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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승 Apr 03. 2024

눈오는 날의 데이트

8화

“눈이다”


누군가의 외마디가 사무실의 적요를 깨뜨렸다. 생각의 바다에 표류하던 수연은 고개를 들어 맞은편 창문을 바라보았다. 정말 눈이 오고 있었다. 태호와의 통화를 마친 오후 세시만 해도 하늘은 여느 겨울처럼 높고 파랬었다. 한두 시간 만에 도시는 흰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하이얀 눈 꽃송이들이 쉴 새 없이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다. 벌써 눈이 쌓였는지 이글루처럼 변한 차들이 느림보 걸음으로 도로를 잔뜩 채우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았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다. 십 년 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둥. 오늘 고백하면 승률 100%라는 둥. 겨우 얼음 결정체가 떨어질 뿐인데도  각자가 자신들의 로맨스에 의미 있는 서사를 부여하고 있었다. 십 년 전 그날도 크리스마스이브였지. 수연도 태호와의 첫 데이트를 떠 올렸다. 숫기 없는 태호거 먼저 동아리 일을 구실 삼아 보자고 했다. 수연은 너무도 뻔한 그 핑계가 귀여워 단박에 승낙해 버렸다. 그날도 눈이 왔었는데… 크리스 이브는 아니었지만 그해 첫눈이었다. 첫 만남. 첫눈. 첫 고백. 첫 키스. 첫사랑…. 로맨틱 영화의 정석이 있다면 그날이었을 것이었다. 함박눈이 아니라 녹아버리는 진눈깨비였지만, 그 눈을 맞으며 수연과 태호는 샤베트처럼 서로에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까의 불안을 잊기라도 한 듯 수연은 쌓여만 가는 눈을 보며 태호와 뭘 할지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작년 태호는 야심 차게 눈사람을 준다며 연탄재만 두 시간 구하러 다니다 실패했었다. 수연이 실망이라도 했을까바 태호는 방수도 안 되는장갑으로 미니 스노우맨이라도 만들어 주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덤벼들었다. 결국 동상에 걸려 며칠은 숟가락도 들지 못할정도로 고생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떠오른 수연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올해는 전망 좋은데 올라가서 실컷 경치나 구경할까? 아님 유치하지만 뒤끝 있는 눈싸움을걸어볼까? 즐거운 상상을 하던 수연은 퇴근시간되자마자, 땡 하고 회사 앞 로비로 달려 내려갔다.


머리카락에 물방울이 맺혀있는 걸 보니 태호는 기다린 지 꽤 된 눈치였다. 수연을 보자 반가운 듯 그는 미소를 지었다. 가는 고운 말 오는 홍두깨라고 수연은 반전 있게 성을 냈다. 아니 왔으면 톡을 했어야지. 우산이 사무실에 없었어? 그럼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라도 하나 사던가. 젖은 태호의 머리가 속상한 그녀의 높은 언성이 주의의 시선을 끌었다. 그런 것도 모른 채 수연은 휴지 꺼내고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냈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해.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걱정이 묻어났다.


태호는 그런 수연의 손을 잡아 제 머리 위에서 내렸다. 손에 물 닿으면 추워. 손수건을 꺼내 그는 그녀의 손을 닦고서는 제 손을 크게 펼쳐 그 안에 수연의 손을 넣었다. 조그마한 그녀의 손이 그의 커다란 손에 폭 안겼다. 감싸 쥔 손을 제 코트 주머니에 넣고 태호는 수연과 함께 밖을 나섰다. 고작 손 하나뿐인데도 수연은 자기 전 태호가 품어줄 때처럼 전신이 따뜻해졌다.  


예약한 식당으로 걸어가는 내내 그는 즐거워 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다 하며 수연도 덩달아 마음이 부풀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기가 익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삼십 년도 더 된 경양식 집이라 그런지 다소 연식이 오래된 분위기였다. 그에 걸맞게 검정조끼를 입고 나비넥타이까지 맨 웨이터가 예약된 자리로 그들을 안내했다.


테이블 위엔 와인잔 두 개와 물 잔 두 개, 서너 가지 포크와 나이프가 잘 정돈되어 놓여있었다. 태호가 코트를 벗어 옆 자리에 놓아두자 아까 그 종업원이 와인을 따라 주었다. 스테이크 집답게 고기에 잘 어울리는 레드 와인이었다. 수연은 와인 잔 아래를 손가락으로 잡고 빙빙 돌렸다. 와인을 공기에 산화되자 목을 축이는 정도로 살짝 맛을 보았다. 산미가 낮고 드라이한 맛이었다. 와인을 한 두 모금 마시니, 곧 스테이크가 나왔다. 태호가 미리 수연의 식성 대로 주문했는지, 미디엄 레어로 굽힌 스테이크는 육즙이 그대로 살아있어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그이기에, 수연은 웬일로 와인을 다 시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스테이크를 써는 그가 할 말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태호는 할 말이 있을 때 꽤나 진중한 표정을 지으면서 뜸을 들이는데, 그때가 딱 그래 보였다. 미적거리는 그의 행동에 수연이 먼저 말을 꺼낼까 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떨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싶었다. 응? 내가 할 말 있어 보였어? 왜?라고 묻는다면 수연에게는 딱히 대답이 없었다. 중요한 얘기면 언젠가 하겠지 하며, 수연은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그러나 에스프레소의 진한 풍미가 촉촉이 묻어나는 티라미수가 다 비워질 때까지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그새 눈은 먿어있었다. 밤이 깊어진 데다 바람까지 매섭게 불어 날씨는 매우 추웠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태호는 밥을 먹기 전하고는 달리 수연의 손을 잡고 코트 안에 넣지 않았다. 수연은 그 행동이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지하철 역에 도착해 개찰구에 다다랐을 때쯤 태호는 지갑을 꺼내지 않은 채 수연을 바라보았다.


“나 미국 가기로 확정 났어”


그 얘기를 왜 지금 여기서 하는데? 이제까지 뭐 하다가?라는 말을 애써 목구멍으로 삼키며 수연은 반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엔비디아라고 했었지? 이야 잘 됐다. 이제 계약하면은 진짜 AI 할 수 있는 거야? 로봇 같은 거 어릴 때부터 만들고 싶어 했었잖아. 일정은 나왔고? 나 연차 붙이면은 국장님이 이주는 괜찮다고 했어. 알고 있지? 참, 가는 김에 저번에 말했던….”


“같이는 못 갈 것 같아...”


태호가 읇조리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스위치가 내려진 기계처럼 수연의 머리는 멈춰버렸다.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음이 들리자 비좁은 개찰구가 붐비기 시작했다. 승객들에게 이리저리 치히면서도 수연의 정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왜 여기 서있고 그래요!!


그녀를 확 밀치며 위아래로 흘기는 한 승객의 말을 듣고서야 수연은 겨우 몸을 비킬 수 있었다.


“그게.. 계약하러 가는 게 아니고 일하러 가야 해서 그래. 몇 년 있어야 될 것 같아. 혼자 갔다 올게”


수연에게는 마치 편의점에 들렀다 집에 간다는 말처럼 들렸다. 일상적이고 평온하게 아무 일 없는 듯이. 이런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또다시 어안이 벙벙해지고 있었다.


“다음은 2호선. 2호선 순환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들려오는 안내방송이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말해주는 유일한 단서였다. 수연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비스듬히 서 있는 그가 너무 낯설게 보였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살짝 혀끝으로 입술을 축인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혼자 가는 이유가 있어? “


“같이 살기 전부터 오퍼 받은 일이었잖아. 회사 비자로 가는 건데. 두 명 다 비자를 해주기 뭐 하고, 외국 생활도 너에겐 힘든 일이야. 게다가 내가 가는 쪽은 비도 많이 오니까 날씨도 우중충하고, 한국사람들도 별로 없고 너 회사도 그만둬야 하고…. “


평소 논리에 비약이 없었던 그가 오늘은 빈틈 투성이었다. 수연은 허점 투성이의 그의 대답에 하나하나 반박을 하고 있었다.


주재원으로 가니 가족 비자 나오는 거야 당연하고. 미국 생활이 뭐가 어려워. 어릴 때도 오하이오에서 잘 만 살았구먼. 게다가 시애틀도 아니고 캘리포니아 날씨가 우중충하다고?  한국 사람들이 없다고? 남부에서 제일 큰 코리안 타운이 있는 게 산타바바라인데? 회사를 누가 그만 둔대? 휴가 내고 가기로 다 이야기된 거였잖아?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반박과 달리 수연의 입에서는 불쑥 다른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럼 헤어지자는 거야?”




-9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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