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치매인 줄 알았습니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을 때

by 파인트리

퇴근길 문 앞에 택배 상자가 있다. 가족이 다섯이고 보니 택배 상자 하나쯤은 늘 있는 일이라서 그러려니 하고 들고 들어왔다. 오늘은 누구 물건일까, 하고 이름을 보니 내 것이다.

"내가 언제 뭐를 샀었나?" 중얼거리면서 상자를 뜯었다.

신발이다. 작년에 신발 한 켤레를 샀는데 너무 편하고 가벼워서 일 년 동안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즐겨 신었다. 급기야 색이 다른 것으로 한 켤레 더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바람까지 생겼던 참이다. 이걸 언제 샀지? 나는 생각만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구매를 하고 말았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언제 구매를 했는지 기억이 없다. 검색을 하다가 잠결에 사버린 것일까, 쇼핑 중독도 아니고 이제는 자면서도 물건을 사는구나 싶어 내가 참 애처로웠다. 구매시점이 언제인지 확인을 해 보려고 카드 내역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뒤져도 가까운 시일 내에 결재한 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기억이 없다.



현금 결제를 했을까? 은행 내역을 뒤지기 시작했다. 없다. 정신적 충격이 다가왔다. 어떻게 구매를 하게 된 것인지 도통 기억이 없다. 그때 들어온 우리 둘째

"엄마 왜 그러세요?"

"응 , 엄마가 신발을 샀나 봐. 그런데 기억이 없어."

"그럴 리가요. 찾아보면 나올 거예요."

나는 침묵에 빠졌다.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60도 안되어서 이렇게 기억이 없어지다니 정말 이제 큰일이구나 싶었다. 커피 한잔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와 조용히 앉았다. 어쨌든 치매는 걸리지 말고 살아야 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기억이 안나는 일이 생기다니 내가 너무 걱정이 되었다. 나는 치매 보험은 들어 있는지 보험부터 챙겨 보기 시작했다. 더 우울해졌다.


두어 달 영혼이 나간 것처럼 일과 몸이 부딪혔다. 일을 할 때는 죽어라 덤벼들고 일이 끝나면 완전 탈진이다. 성격이 문제다. 일을 보면 적당히를 못 본다. 어떻게 하면 잘하게 될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덤벼 들고 같이 하게 된다. 이런 나 때문에 동료들도 얼마나 힘이 들까 돌아서서 안쓰러운 생각을 많이 하기도 한다. 회사에서 원 하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보다 일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내 탓이 크다. 나도 힘들고 주위 사람들도 힘들게 하는 이유이다. 알면서도 현장에서는 수도 없이 레이다망이 돌아가고 수도 없이 많은 일에 몸이 뛰어든다. 이렇게 두어 달을 보내면서 퇴근하면 책을 한 장 펼치기는커녕 그냥 잠만 잤다. 새벽이면 일어나서 하루 중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다시 또 어김없이 5시 반이면 출근하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단순한 생활이 나의 기억을 지워 버린 것일까, 이렇게 집중하고 있는 생활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몸이 피곤하니까 아무 생각을 안 하고 살게 된 것일까. 자기반성이 이어졌다. 지난달부터 정기 구매로 쌓이기만 하는 책들이 책상 위에서 나를 빤히 보고 있다. 심지어 포장도 듣지 않은 책도 있다. 몸이 정신을 지배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정신줄 붙잡아야 하는 노후 초년에 이런 영혼 붕괴를 겪다니 내가 참 걱정이 되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커피까지 쓰디쓰게만 느껴졌다.


식구들이 하나씩 귀가하면서 나의 상태를 점검하고 걱정했다. 둘째가

"엄마 우울해하셔. 신발 샀는데 기억이 없으시대." 이 말을 들은 큰딸은

"엄마 뭐 그런 걸로 우울해하셔. 그럴 수도 있지." 달랜다. 나는 시큰둥 기분이 별로다.

남편이 들어온다.

"아빠, 엄마 기분 안 좋아. 엄마가 치매 걸린 것처럼 신발을 산 기억이 없으시대."

그 말을 들은 신랑도 한마디 한다.

"우리 나이가 그럴 수도 있지 뭐, 별것도 아니구먼."

둘째가 걱정스럽게

"그런데 돈을 지불한 내역도 없대, 그래서 더 우울해지셨어."


식구 중에 꼴찌로 막내가 귀가했다. 우리 둘째 막내에게

"귀염둥이 막둥아 엄마한테 애교 좀 펼쳐라, 엄마 우울하시다."하고 말했다.

막내는

"왜?"하고 물었다.

"엄마가 신발을 산거 같은데 기억이 없으시대. 그것도 아주 깡그리. 구매 내역도 없고, 그래서 어떻게 샀는지 고민에 빠지셨어."


그 말을 들은 막내가 큰소리로 웃었다.

"엄마. 엄마! 나는 엄마가 아직 퇴근을 안 하셨나 보다 생각했어요.

오늘의 서프라이즈로 내가 신발을 선물했는데 왜 반응이 없을까 했지?"

갑자기 집안이 환해졌다. 웃음꽃이 폭발했다.

나는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아니 그런데 내가 저 신발 사고 싶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 막내에게 물으니

"엄마가 편하고 좋다 하셨잖아요. 엄마 요즘 피곤해해서 내가 신발 상표를 보고 구매했지."

막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 나는 계속 카톡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엄마가 신발을 받고 나면 선물인걸 눈치채고 막둥아 하고 하트를 뿅뿅 날려 줄 것이라 기대했지."


큰 아이랑 둘째는 막내를 얼싸안고 이뻐한다.

"아이고 기특한 막내. 우리 엄마 괜히 우울했네." 큰아이가 말했다.

"엄마 치매 걱정 안 해도 되는구먼." 둘째도 한마디 한다.

" 휴~ 다행이다. 나는 진짜 내가 치매에 걸린 줄 알았어. 기억이 전혀 안 나서~"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