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을 바르는 이유
직장 생활을 시작한 어느 날 퇴근길 내가 탄 버스의 차창으로 내 얼굴이 보였습니다. 세상 고뇌를 다 안고 있는 표정, 볼품없이 길게 늘어진 머리는 아무렇게나 묶여있었지요. 얼굴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눈빛은 길을 잃어버렸고, 버스가 데려다주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 마냥 맥없이 앉아 있어요. 금방이라도 땅속으로 사그라질 것처럼 기운은 없어 보였구요. 신호등에 나란히 서 있는 다른 버스의 안이 들여다보였습니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같은 퇴근길이지만 나처럼 맥없이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어요. 나처럼 아무렇게나 대충 하고 나온 사람은 더더구나 없었습니다.
생산직이라는 게 퇴근할 때는 거의 파김치가 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내모 습이 엉망인 줄은 몰랐어요. 슬그머니 내가 부끄러워졌어요.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라고 우기면서 살아온 나였어요.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상대를 평가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다 죽어가도 눈빛만 살아 있으면 살아있는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지요. 생각해 보니, 겉모습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게으른 자의 위로가 내 마음에 있었던거 같아요. 그런데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이 싫었어요. 당장 버스에서 내리고 싶었죠. 행여 아는 사람 그 누구라도 마주칠까 조바심까지 생겼어요. 아이들에게 매일 이렇게 지친 엄마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어요. 남들이 어떻게 보든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적어도 가족들을 피로하게 만들지는 말았어야지, 하는 생각에 답답함이 밀려왔습니다. 나를 돌보지 않고 살아온 시간들이 후회되기 시작했어요.
버스가 다음정류장에 멈추자마자 바로 내렸습니다. 그 길로 곧장 미용실을 찾았죠. 미용실 가는 돈이 아까워서 아무렇게나 길렀던 머리를 가장 짧은 커트로 잘랐습니다. 마치 구질구질한 나를 잘라내 버린 듯 시원했어요. 목뒤로 흐르는 바람이 한껏 마음을 가볍게 했습니다. 나를 돌보는 게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화장품 가게에 들러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립스틱을 샀어요. 트로트 가사 중에 한 부분인 그 여자의 마스카라가 아니라, 그 여자의 립스틱을.
“값싼 옷은 어쩔 수 없지만 깨끗한 얼굴은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나의 최선의 행동이다”라고 했던 어른이 있었어요. 항상 세면도구를 챙겨 다니며 자신을 정비한다고 했지요. 그분은 ‘단정함은 세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기도 하고 ‘자신이 세상을 허투루 살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라고도 했어요. 그 말씀이 불현듯 떠올라 마음속으로부터 부끄럼이 올라왔습니다.
사실 그 분은 제법 큰 규모의 가구점을 하시다가 불이나서 망하신 분이셨어요. 방 한칸 구할 돈도 남아 있지 않아서 식당 설거지로 근근이 살아가던 분이셨습니다. 부잣집 마님 이셨다가 하루 아침에 생계를 걱정하게 되니 스스로가 비참해서 견디기 힘드셨다고 했습니다. 중학생 딸래미의 차비라도 벌어보자는 생각에 설거지 일을 나가기 시작했는데 일을 안하던 분이라서 너무 서럽고 힘드셨대요. 나이 먹어서 구박 받는것도 힘들고 자신이 할 줄 아는게 없다는 것도 서러우셨대요. 그래서 사는둥 마는둥 그렇게 힘들게 세월에 흘러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자고 있는 당신의 얼굴을 중3인 딸래미가 정성 스럽게 닦아주고 있더래요.
"엄마! 요즘 힘들어서 세수도 못하고 다녀? " 라고 말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더래요. 정신이 퍼득 났대요. '아이앞에서 힘든 모습 보이지 말아야 겠다. 나는 엄마였지!!!' 이런 생각들이 그 순간 다짐이 되었대요.
나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힘듬을 들키지 말아야지. 엄마는 항상 씩씩하다는것을 보여 줘야지.'
주섬주섬 그 어른의 말씀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어요. 파우치 하나를 가방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나이 들어가면서 거울도 보기 시작했지요. 현관을 나설 때도, 직장에서 퇴근을 할 때도 2.30대에도 자주 본 적 없는 거울을 보고 다녀요. 모양이 너무 엉망이면 다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나옵니다. 지금 이순간 나와 세상 사람들과 모든 것에 예의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의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집 앞에 도착하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텐션을 끌어올립니다. 슬쩍 장난기를 안고 기분 좋은 얼굴로 집안으로 들어서지요. 가족들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맨날 피곤해서 자신의 몸을 질질 끌고 간신히 집에 오던 엄마가 깔끔하고 말짱한 모습으로 귀가를 하니 너무나도 좋아했습니다. 맨날 미안하고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남편의 얼굴도 환해 졌어요. 가족들의 저녁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속으로는 뜨끔했어요. 얼마나 힘들어 보였으면 , 얼마나 엄마가 안타까워 보였으면 변하는 엄마 모습에 저렇게 환하게 반응을 보일까 싶어 그동안의 행색이 미안했지요. 마음을 정비하고 나를 정비하기 시작하니 직장 생활도 즗거워 지기 시작 했어요. 퇴근할때도 그렇게 지쳐 보이지는 않았구요. 나를 위해 무엇이라도 공부를 해야 겠다는 생각도 하기 시작 했지요. 이제 퇴근길에 립스틱을 예쁘게 바릅니다. 생기 넘치는 사람으로 살아 가려구요. 아직 기운이 팔팔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 주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