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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트리 Apr 01. 2023

그 여자의 립스틱!!!

오래 보아야


직장 생활을 시작한 어느 날 퇴근길 내가 탄 버스의 차창으로  내 얼굴이 보였다. 세상 고뇌를 다 안고 있는 표정, 볼품없이 길게 늘어진 머리는 아무렇게나 묶여있다. 얼굴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눈빛은 길을 잃어버렸고, 버스가 데려다주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 마냥 맥없이 앉아 있다. 금방이라도 땅속으로 사그라질 것처럼 기운은 없어 보였다. 신호등에 나란히 서 있는 다른 버스의  안이 들여다보였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같은 퇴근길이지만 나처럼 맥없이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처럼 아무렇게나 대충 하고 나온 사람은 없었다.      


생산직이라는 게 퇴근할 때는 거의 파김치가 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내모 습이 엉망인 줄은 몰랐다. 슬그머니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라고 우기면서 살아온 나였다.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상대를 평가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다 죽어가도 눈빛만 살아 있으면 살아있는 것이라고 믿고 살았다. 생각해 보니, 겉모습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게으른 자의 위로가 내 마음에 있었다. 그런데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이 싫었다. 당장 버스에서 내리고 싶었다. 행여 아는 사람 그 누구라도 마주칠까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매일 이렇게 지친 엄마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적어도 가족들을 피로하게 만들지는 말았어야지, 하는 생각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나를 돌보지 않고 살아온 시간들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버스가 다음정류장에 멈추자마자 바로 내렸다. 그 길로 곧장 미용실을 찾았다. 미용실 가는 돈이 아까워서 아무렇게나 길렀던 머리를 가장 짧은 커트로 잘랐다. 마치 구질구질한 나를 잘라내 버린 듯 시원했다. 목뒤로 흐르는 바람이 한껏 마음을 가볍게 했다. 나를 돌보는 게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화장품 가게에 들러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립스틱을 샀다. 트로트 가사 중에 한 부분인 그 여자의 마스카라가 아니라, 그 여자의 립스틱을.     


“값싼 옷은 어쩔 수 없지만 깨끗한 얼굴은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는 나의 최선의 행동이다”라고 했던  어른이 있었다. 항상 세면도구를 챙겨 다니며 자신을 정비한다고 했다. 그분은 ‘단정함은 세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기도 하고 ‘자신이 세상을 허투루 살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라고도 했다. 그 말씀이 불현듯 떠올라 마음속으로부터 부끄럼이 올라왔다. 


주섬주섬 그 어른의 말씀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파우치 하나를 가방에 넣었다. 세면도구다. 세숫비누 정도는 넣어 가지고 다녀야 피곤한 얼굴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이 들어가면서 거울도 보기 시작했다. 현관을 나설 때도, 직장에서 퇴근을 할 때도 2.30대에도 자주 본 적 없는 거울을 보고 다닌다. 모양이 너무 엉망이면 다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나온다. 젊은 나이의 자랑인 패기는 없어지고 허투루 나이 먹은 부끄럼만 남은 것 같은 행동이기는 하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모든 것에 예의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의 행동이기도 하다.   


집 앞에 도착하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텐션을 끌어올린다. 슬쩍 장난기를 안고 기분 좋은 얼굴로 들어선다. 가족들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맨날 피곤해서 자신의 몸을 질질 끌고 간신히 집에 오던 엄마가 깔끔하고 말짱한 모습으로 귀가를 하니 너무도 좋아했다. 가족들의 저녁 표정이 밝아졌다.  

속으로는 뜨끔했다. 얼마나 힘들어 보였으면 , 얼마나 엄마가 안타까워 보였으면~~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가 생각난다. `가까이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 멀리 보아야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오래 보면 힘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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