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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Oct 20. 2023

프롤로그: 코로나가 쏘아 올린 공

드디어 코로나 감염병 등급이 4급으로 내려갔다. 


질병 등급이란 게 있었나 싶어 관련 기사를 읽어보니 그동안 코로나는 결핵, 홍역, 콜레라 등과 같은 2급이었다고 한다. 이제 4급으로 내려갔으니 독감과 같은 수준이다. 2급과 4급 사이의 질병학적 거리를 잘은 모르지만, 왠지 친숙해진 것만 같다. 코로나는 이제 공식적으로 팬데믹(pandemic: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에서 엔데믹(endemic: 풍토병으로 굳어진 전염병)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불현듯 우리에게 성큼 다가와 버렸다.  


코로나가 처음 발생한 2020년 이후의 시간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뉴스만 틀면 온통 코로나19 확진자 추세에 대한 보도뿐이었다. 매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혹시나 확진자가 확 늘진 않았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리모컨을, 핸드폰을 손에 쥐었었다. 매일같이 확진 추세에 대해 브리핑하느라 머리가 하얗게 새버린 질병관리청장의 머리카락을 보며 안타까워하기도 했고, 가족이나 친구, 회사 동료 중 확진자가 나왔다고 하면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었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는 꽤 오랫동안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거의 매일 밤 방역을 해서였을까.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모두가 피하고 싶어 했던 ‘최초 확진자’가 나왔고 겉으론 그 사람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최초라는 주홍글씨 때문에 앞으로 회사생활을 잘 할 수 있겠느냔 집단 이기심에 감염되기도 했었다.          


한국의 경우 대구에서 시작된 한 종교집단의 집단감염이 코로나 확산의 분기점이었던 것 같다. 그때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잠깐이긴 하지만 대구 지역 전체를 봉쇄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가뜩이나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지역에서 진보 정권을 향한 분노는 하늘이 아니라 우주까지 찌르고 나갈 기세였으니까. 1차 대유행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이 종교단체는 코로나 시국에(맞다. 그땐 시국이란 말을 참 자주 썼다) 방역 수칙을 무시하고, 검사를 받으라는 권유도 무시한 채 이곳저곳 다니며 집단으로 모여 있다가 감염자를 주렁주렁 배출했으니 전 국민의(특히 대구시민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이전까지 전국 확진자 그래프는 콩나물시루처럼 대부분 지역이 엇비슷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대구가 1,000명을 넘어 선두 주자로 치고 나가기 시작하더니 그 이후론 경쟁자가 없을 정도였다. 봉쇄만 안 했지, 사실 대구는 봉쇄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대구를 오고 싶어 하지 않았고 거꾸로 대구에서 온다고 하면 손사래를 치면서 정중하게 거절당했으니까 말이다. 지금에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땐 진짜 서러웠다. 아무튼 이후 이 단체의 실상(비밀스러운 포교 활동 등)이 언론을 통해 낱낱이 파헤쳐졌고 교주는 구속당했다. 이 단체의 이름이 들어간 대구의 어느 한 아파트는 결국 아파트명을 교체하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어느 날 꼭 들려야 할 일이 있어 마스크를 꼭꼭 쓴 채 서점에 갔었다. 어느 서점이나 입구에서부터 제일 눈에 잘 들어오는 위치에 베스트셀러나 언론 등을 통해 화제가 된 책들을 진열해 놓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서점 이곳저곳에서 <페스트>가 눈에 자주 띄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코로나19가 터지고 나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가 <페스트>였단다. 궁금해서 더 찾아보니 2019년까지 약 30년 동안 국내에 번역된 <페스트> 판본이 32개가 있었는데, 2020년 한 해에만 무려 18권의 판본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출간된 지 50년도 더 지난 책이 역주행한 이유는 아마도 소설 속 상황(오랑 이라는 도시에서 전염병이 돌아 도시 안에 갇힌 사람들이 서로 연대해 함께 싸워나가는 이야기)이 우리가 실제 처한 상황이 비슷해서였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회사에서 독서 동아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방식은 3주 정도에 한 번씩 모이는데, 한 명씩 돌아가면서 책을 고르고 발제한다. 내가 첫 스타트를 끊었는데 그때 정했던 책이 <페스트>였다. 코로나의 낌새도 안보일 2019년 중순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첫 모임인 만큼 잘 시작하고 싶었다. 깊이 있는 문학을 읽고 힘든 직장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보자는 나름 거창한 설립 취지로 회원들을 모집했다. 그랬기 때문에 거창한 문학작품을 고르고 싶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시작부터 너무 어려운 책을 골라 힘을 빼버리면 다음부터 나 혼자 앉아 있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어서 이래저래 한참을 고민하다 선택한 책이 <페스트>였다. 주제도 묵직하고 이야기 전개도 흥미로우며,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다양해서 토론 거리도 많겠다 싶어서였다. 결과는? 아쉽게 그날 이후 바로 한 명이 탈퇴했지만 2023년이 저물어가는 지금까지도 모임은 계속되고 그사이 회원도 2명이 늘었으니 꽤 거창한 모임이 돼버린 건 아닐까.    


그런데 고백하자면 <페스트>를 선택한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 간단하게 카뮈란 사람이 너무 좋아서였다. 크으. 평생을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과 눈 부신 바닷속에서 삶의 부조리를 느끼고 저항하면서 살다 간 지식인. 그리고 비운의 자동차 사고로 스스로 삶의 부조리함을 몸소 증명하기까지. 그래서 사실 내 고민은 처음부터 <페스트> 아니면 <이방인> 중 하나였다. <이방인>이 훨씬 얇긴 한데, 결국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첫 모임부터 부조리 끝판왕 체험보단 연대의 가치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카뮈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실존주의라는(유행이 좀 지난) 한 철학 분야 때문이다. 서점에서 다양한 판본의 <페스트>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고 카뮈가 다시금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다. 3주마다 한 번씩 열리는 책 모임에서 난 정말이지 시도 때도 없이 실존주의를 언급하는데 그럴 때마다 ‘쟤 또 시작했다.’ 눈총을 받고 있어서 스스로 실존주의 말 안 하기 챌린지 중이다. (그런데 훌륭한 문학작품일수록 주인공의 근본적인 내면 변화를 다루는 경우가 많고, 그 변화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임을 생각할 때 실존이란 단어를 참아내고 토론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페스트>가 아무리 많이 팔려도 우리 사회의 관심이 카뮈와 <페스트> 넘어서 실존주의까지 다다르지는 않는 것 같다. 사르트르나 시몬 드 보부아르, 메를로퐁티, 하이데거 등등 거칠게나마 실존주의 계열로 묶을 수 있는 철학자들의 책은 여전히 빛이 들어오지 않는 서점 한 구석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실존주의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란 책은 2013년 이후로 한 번도 새로 번역되지 않았다. 한편으론 이해가 된다. 철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누가 이름만 들어도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실존주의라는 것에 관심을 가질까.      


게다가 유행이 지나고도 한참 지났다. 실존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전쟁과 대공황이 광풍처럼 휘몰아치던 20세기 중반이었다.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가 각각 1942년, 1947년에 출판되었고,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1943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출판연도가 1946년이니까 모두 2차 대전이 한창이거나 막 끝났을 무렵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오기까지는 약간의 시차가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청준, 최인훈, 손창섭, 장용학, 마광수 등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국내 독자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실존주의가 탄생하기 위해선 전쟁과 같은 어마어마한 부조리의 충격이 가해져야 하는 모양이다. 카뮈와 사르트르에겐 2차 대전이 있었고 우리에겐 6.25가 있었듯이.    


자 그렇다면 왜 다시 철 지난 실존주의일까? 실존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앞으로 쓰게 될 별 볼 일 없는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고민의 흔적들이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철학이다. 그래서 반드시 개인의 삶 속에 녹아들어야 의미가 있다. 그래서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는 개인적인 일상의 이야기들이며, 그 속에서 내가 발견한 실존주의의 경험들이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고, 내가 왜 태어났으며, 무슨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지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돌이켜보면 내 20대를 온통 지배했던 생각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별로 관심이 없다오히려 우리가 누군가가 아님을 알아차리길 원한다우리는 누군가로(혹은 누구의 누구로), 무엇(직업, 소명 등)으로 고정된 채로 살아가는 게 아님을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하나의 고유한 존재로 살기를 간곡하게 요청하는 것이 실존주의다.     

      

그런 면에서 실존주의 이전의 철학은 너무 거창했다. 플라톤 이후 근대적 자아가 등장하기 전까지 철학은 신(본질)에 대한 탐구를 위한 신학의 사명을 거들 뿐이었다. 그 이후론 이성과 합리성이 주목받아 근대를 열어젖히더니 이내 그것의 실체 없음, 근거 없음에 대한 성토장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지금의 철학은 결국 영원한 것, 즉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의 다양한 변주로 들린다. 그런데 여기에 개인이 끼어들 틈이 안 보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being)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existence)인데. 철학은 분명 왜 인간이 존재하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과 방법 모두를 제시하곤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저 인간이 인류 보편의 ‘인간’이란 점이다. 지금 기차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내 옆자리에서 (뭔가 엄청 재미있어 보이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 다른 승객은 다른 사람인데 기존 철학은 우리가 모두 하나의 목적지로 향해가는 같은 인간으로 취급해 버린다.           


개인주의의 시대라고들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가치가 중요해졌고 개인의 개성과 선호가 우선시되고 있다. 퇴근 후 회식에 모두가 참석하는 것이 과거에는 당연해 보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저는 회식 안 가고 싶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신입직원을 보면서 난 확신했다. 개인보다 조직이 더 중요하고, 국가가 우선시 되었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를테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상투적으로 사용되던 이런 대사들. ‘조직이 살아야 개인이 살지’라든지, ‘조국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라는 클리셰들. 이젠 안녕.     


그런데 우린 정말로 진정한 개인으로서 다시 태어난 걸까. 타자와 구별되는 개인, 그러니까 고유한 개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냐는 말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유행에 민감하고, 남들이 다 하니까 먹고, 보고 따라 하는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린 그저 서로 다른 마스크만 쓴 채 군중 속에 휩쓸려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들이 하는걸 하지 않으면 나만 뒤처지는 게 아닌가 싶어 조바심이 나니까? 그래서 따라 해야 안심이 되니까?           


다시 서점 이야기. <페스트>보다 훨씬 더 눈에 많이 띄는 책들이 있었다. ‘내 안의 나, 내 인생, 인생의 진리, 삶의 해답’ 등에 대해서 정공법으로 승부를 보는 자기 계발 서적들이다. 인생이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자기 계발 서적들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저자들은 모두 각자 삶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생은 반짝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컨트롤할 수 있는 만만한 녀석도 아니었다. 우린 세상에 맞서 이길 만큼 그렇게 강하지 않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반대편에 서서 이렇게 말한다. 삶은 아름답지도 않고, 오히려 무의미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 덩어리라고. 이상하게도 난 이게 위로가 된다. 현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더 안심된다. 그래서 힘이 난다. 이를테면 삶에 대한 160km 돌직구라고 할까. 실존주의는 거기서부터 시작하자고 한다. 일단 삶에는 의미가 없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지 말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그리고 그 선택은 절대로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실존주의가 또 위로가 되는 건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함께’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만만친 않은 선택이지만 함께여서 버틸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원래 유행은 돌고 돈다. 언제 다시 실존주의 유행이 찾아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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