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Jo Jun 30. 2023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3. 실존주의 시리즈

나는 아직도 실존주의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할 자신은 없는데, 어쩌면 ‘태어난 김에 산다’라는 저 말에 수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해왔던 의미가 숨겨져 있단 생각을 해본다.      


몇몇 사람들은 실존주의가 철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분이나 혹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지침서 정도로만 치부(혹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슬픈 열대>로 유명한 철학자 레비스트로스는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한 철학은 ‘매장 판매원의 형이상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독설을 날렸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는 훗날 사르트르와의 논쟁을 통해 그 똑똑한 사르트르를 박살 내고 실존주의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렇게 구조주의가 등장하면서 철학사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실존주의의 짧은 유행은 끝이 난다…) 그런데 실제로 실존주의는 다른 철학 분과들처럼 명확한 이론체계가 없어서 이 말은 (분하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게다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실존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은 독일의 하이데거였는데 정작 그는 한 번도 자신을 실존주의자라고 인정했던 적이 없다. 그 위를 거슬러 올라가면 후설이란 사람도 빠질 수 없고 좀 더 올라가 보면 평생을 ‘불안’이라는 상태에 천착했던 덴마크의 키르케고르까지 실존주의 계보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실존주의 개념을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대표선수를 꼽자면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일 것이다.      


왜냐고? 아마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는 짧은 말 한마디 때문일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실존이나 본질이나 비슷한 거 아닌가?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보자면 아마 이런 뜻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의자는 사람이 앉기 위한 본질, 즉 정해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만약 어떤 의자를 만들었는데 그 의자에 아무도 앉지 않는다면 그 의자는 존재 이유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인간은 그 어떠한 본질(=목적)도 없이 태어났는데,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찾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물음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가혹할만큼의 연속적인 선택과 책임의 무거움이 따라온다. 결국 실존이란 정해져 있지 않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상태라고도 볼 수 있겠다.     


알베르 카뮈는 작품 <페스트>와 <이방인>으로 잘 알려진 작가인데, 실존주의 사상이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는 상당 부분 카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 첫 대목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철학은 플라톤 이후로 진리란 무엇인지(존재론), 진리가 있다면 어떻게 알 수 있는지(인식론), 잠깐, 정말 진리라는 게 있다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물음과 사유 아니었던가? 그런데 자살이라니. 바로 뒤 문장을 마저 읽어보자.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뮈가 하고 싶었던 말은 철학은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장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지 열두 가지인지의 문제는 그다음 일이고 (칸트를 겨냥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건 장난에 불과하다고까지 지적한다. 만약 삶에 의미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면 살아 있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삶을 중단하면(=자살) 된다.      


우리가 아무런 목적 없이 내던져진 이 세계는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최근에 가지게 된 습관 중 하나가 하늘을 쳐다보는 건데, 더 정확히는 우주를 쳐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왠지 더 피부적으로 와닿는 밤하늘을 더 좋아한다.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우주의 크기를 상상해보면 지구라는 작은 행성이 그렇게도 초라해 보일 수가 없다.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과 지구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생각해 보면 초라한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일, 예컨대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금리가 얼마나 오르내리고, 그래서 부동산 시장이 어떻게 되고 등등의 일들은 우주의 시각에서 보면 아 정말 별거 아니구나, 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직장에서 잘 풀리지 않는 문제로 씨름하고, 누가 함부로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상처를 받으면 난 이걸 ‘우주적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마음을 추스른다. “너 고작 그따위 일로 침울해져 있을 거야? 우주에서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그래서 카뮈는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설마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다. 비록 불운한 자동차 사고로 죽긴 했지만, 카뮈는 평생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한 진정한 실존주의자였다. 마치 거대한 흰 도화지 한 장이 펼쳐져 있다고 상상해보면 좋은데, 아찔할 정도로 거대하고 흰 도화지의 기본 상태는 아무것도 없는 의미의 공백 상태이지만 그 위를 다양한 색깔과 모양으로 그릴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뭐야 이건? 하고 구겨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태어난 김에 산다”라는 저 말에는 태어난 김에(=아무런 목적 없이 내던져진 김에), 산다(=자살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매우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제부터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해볼까 한다.      

이전 03화 태어난 김에 사는데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