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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써니 Oct 21. 2022

잠만보와 나무늘보

그댄 나의 전우

잠이 많다.

잠이 많은 사람은 다른 면은 모두 차치하고 일단 게을러 보인다. 까치집을 지은 머리와 반쯤 감은 눈, 헤실헤실한 표정, 목이 잔뜩 늘어진 잠옷 웃도리에 이상하게도 꼭 한쪽 다리만 무릎 위까지 걷어 올라가는 잠옷 바지까지. 사실은 그게 나의 시그니쳐, 즉 디폴트 값이다.





학창 시절 자주 집 앞에 찾아와 내 방 창문 앞에서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던 친구는 시험기간에도 늘어져라 낮잠을 자고 있는 나를 보며 혹시 낮에 자고 밤을 새우는 것이냐 묻기도 했었다. 그럴 리가. '미안, 나는 밤에는 더 잘 잔단다.'


지금은 남편이 된 나의 전 남자 친구는 급한 시험들을 앞두고 꼭 도서관에 가는 나를 참 의아해했었다. 바르게 앉아 책을 보고 노트를 끼적이는 시간보다 엎드려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걸 본 탓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잠깐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엎드리고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프다며 나갔다 와서 또 책을 뚫어져라 보다 엎드려 있었다고 했다. 한쪽 볼이 책에 눌려 벌겋게 납작해져서는 이제 다 했다고 집에 가자며 뿌듯이 웃을 적엔 진심으로 어이없었다고도 했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잠이 많았던 나를 보며 졸려서 사회생활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다고 했다. 자칫 걱정이 씨가 될까 말씀도 못하고 계시다 딸의 사회생활이 장장 10년을 훨씬 넘어갈 즈음에야 안심하고 옛날옛적의 걱정을 입 밖에 꺼내셨다.


다행히 잠이 많고 게으른 것과는 별개로 내 일을 마쳐야 하는 성격 덕분에 같은 공부량도, 같은 양의 일도 효율적으로 단순히 해내는 능력만 발달했다. 토끼가 겁이 많아 귀가 커지고 뒷다리가 길어진 것처럼 나는 잠이 많다는 단순한 이유로 최단 시간, 최대 효율을 장착하려 노력했다.






그랬던 사람이 엄마가 되었다. 

내 멋대로 자고 싶을 때 잠들기는커녕 누울 수도, 잠이 들어서도 안 되는 기묘한 시간이 찾아온 거다. 육아엔 최단시간 최대 효율 그딴 건 없었다. 내 시간을 쏟고 마음을 들이고 애정을 넣어야 '그만큼'의 아웃풋이 나왔다. 그것도 넣은 만큼, '그 만큼'의 아웃풋이 나오면 다행이게. 가끔은 뽑기의 '꽝! 다음 기회에..' 처럼 진 빠지는 삽질의 시간도 수시로 주어졌다.



엄마가 잠만보마냥 게으른 사람이면 아빠라도 바지런하면 좋으련만 이 집의 아빠는 알고 보니 마음만 먹으면 하루 12시간은 거뜬히 자버리는 신생아 같은 사람이었다. 제대로 쉬고자 마음먹은 주말이면 기름기 번뜩이는 뽀얀 얼굴로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개운하게 일어난다. 엉덩이는 어찌나 무거운지 소파에서 떼기가 어렵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마감시간 직전이 되어야만 움직인다. 연애시절엔 미처 알지 못했다. 매일같이 말끔한 모습으로 부지런히 찾아 오길래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지. 장장 6년의 시간을 딴 사람처럼 살아왔던 거다. 

희대의 사기극.






엄마가 된 잠만보와 아빠가 된 나무늘보는 둥글둥글 뒹굴뒹굴 판다 같은 아기를 낳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잠만보와 나무늘보는 비슷한 성정이라 서로를 너무 이해한다는 것. 내가 그러니 너도 그럴 것에 이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서로의 얼굴이 몹쓸 지경이 되었다 느껴질 즈음에는 기꺼이 바통을 옮겨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게으를지언정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굳이 같이 힘들 필요 없잖아? ... 하나는 살아야지.



'딸칵' 불을 끄고 슬쩍 문을 닫고 나가주는 뒷모습에서는 진한 전우애가 느껴졌다. 엄지를 번쩍 들어 경의를 표하고 다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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