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사랑의 시작
시작은 나였다.
나의 피를 나의 살을 나누었다. 내가 먹은 음식을 나누고 내가 쉬는 숨을 나누고 나의 생각과 마음까지 나누었다. 천천히 나와 연결되어 모든 걸 공유하던 또 다른 '나'는 한순간 타인이 되었다. 내가 타인이 되는 과정은 살을 찢고 뼈를 짓이기는 아픔이었으나 슬픔이나 괴로움은 결코 아니었다. 아픔을 동반한 희열이었고 열락이었고 다시없을 영광이었다.
나로 시작한 타인이 내 앞에 모로 누워있다. 이불에 눌려 잔뜩 부푼 볼을 갖고 색색 소리를 내며 따숩고 달큰한 숨을 내쉬고 있다. 여전히 가끔은 나 같고 가끔은 남 같은 이 타인과의 동거생활은 제법 재미나다. 나로 시작했기에 수시로 가슴이 저릿해지고 내가 아니기에 수시로 파안대소한다.
자고 있는 '타인'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리 즐거울 일인지, 이제는 커버린 발을 붙잡고 동그란 발가락을 하나씩 굴리는 일 정도로 이리 마음이 충만해질 일인지 예전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나는... 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미소한 번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주변에 아기들이 하나둘 많아졌을 적에도 잠깐 안아주는 것도 만지고 예뻐하는 일도 어려워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냥 '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구나..'라고 여기고 살았다.
그랬던 사람이 인생의 수순인 양 결혼을 하고 때가 되어 '아이'가 있었으면... 싶었던 것 같다. 그저 그게 삶의 이치인 양 특별한 계획도, 책임감도, 사명감도 없었던 채로 말이다. 그 마음을 알았던지 아이는 꽤나 '밀땅'을 하다 나에게 와주었다. 내가 아이를 선택했다기보다 아이가 나를 간택해 준 느낌이었달까. 귀한 간택에 소인은 심히 영광스러웠다.
이제는 안다. 나는 아이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무서워했던 모양이다. 그 작고 소중하고 연약한 생명을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이다. 나의 영향으로 누군가에게 생채기가 나고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 몹시 두려웠던 거다. '낯섦'과 '두려움'을 '비호감'으로 착각하고 있었던가보다.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교육이라며 미리 인형을 안아보기도 하고 씻겨보기도 했지만 진짜 아기는 전혀 달랐다. 열 달 동안 한 몸처럼 숨 쉬고 이야기 나누고 기다렸던 그 아이가 맞는지 낯설을 정도였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해 온 몸을 늘어뜨리고 오롯이 나에게만 의지하고 있는 생명을 편안하게 안는 일조차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라면 당연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것들 중에 하나도 '당연'한 건 없었다.
엉거주춤 한쪽 어깨는 한참 귀 언저리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 따뜻하고 보드라운 묵직함에 마음 가운데에 몽글몽글 무언가가 옅게 피어올랐다. 그 작디작은 아가의 다리가 남들보다 조금 느슨하게 메어있다는 전문가들의 날벼락 같은 진단에는 죄책감과 연민 책임감이 뒤엉긴 세상 처음 느끼는 복잡하고 끈적한 감정이 수시로 오르내렸다. 게으른 엄마의 사랑은 그렇게 한 발 늦게 다른 여러 이름과 뒤섞여 부피를 키우는 거였다.
'아기'가 언제까지 아기가 아니듯 이'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다.
시작부터 무조건적으로 아기를 사랑하고 자애롭고 모성애가 충만할 수는 없는 그냥 사람이다. '애 by 애' 이듯 '엄마 by 엄마'인 것도 당연하다. 아기를 좋아하던 엄마도, 아기를 좋아하지 않던 엄마도 모두 맞고 모두 당연하다. 신과도 비교되는 그 무거운 이름에 내가 한 사람의 '우주'가 된다는 책임감과 중압감에서 도망가고 싶어지는 것도 '비정상'이 아니다. 그런 여러 과정과 마음의 부침을 모두 겪어내고 지금 자고 있는 아이의 노곤 노곤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음의 충만해짐을 느끼고 있다면... 나는 '엄마'다.
수없이 많은 멜로 영화에서 사랑에 빠지는 시간도 공간도 bgm마저 다르듯 엄마와 아이의 러브스토리 또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언제고 결국은 사랑에 빠진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