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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미국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은 전부 거기에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애리조나로 이사하며...... 엄마와 차 한 대 지나다니지 않는 미국 서부의 고속도로를 달리며 라디오를 틀고 창밖을 구경하던 것, 함께 열창하던 것(비록 <무조건>이나 <자기야> 따위의 촌스러운 한국 노래였음은 아이러니하지만), 엄마의 친한 친구들이자 가족 같은 사람들과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을 보냈던 것. 나보다 한 살 많은 유진 언니와 열심히 준비해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 안무를 보였고, 크리스마스 양말을 벽난로 위에 걸어 다음날 아침 선물이 들어 있길 기대하며 잠들었다. 실제로 다음날 무언가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캔디 케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유진 언니네 가족과는 참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아직도 유진 언니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을 정도로 10년도 채 안되는 시간이 내 이십몇 년 인생에 상당한 행복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때는 할로윈이었는데, 내가 마녀 코스튬을, 언니가 공주 코스튬을 입었다(이때 언니의 코스튬을 조금 탐냈던 것 같기도 하다). 한국에서의 할로윈 이벤트는 서울 클럽에서나 즐기는 인싸 파티 문화로 여겨지겠지만 미국에서의 크리스마스나 할로윈은 생각보다 본격적이기 때문에, 집집마다 장식을 박고 소재를 도배해 당일이 다가오면 자연스레 축제가 형성되는 불문율이 있다.
우리는 바구니나 튼튼한 봉투 따위를 들고 다니며 "트릭 오어 트릿"을 외치고 다녔다. 가짜 전기톱을 들고 쫓아오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분장을 한 아저씨 때문에 유진 언니와 나는 거의 울며 도망쳤다. 우리 엄마는 그 아저씨에게 조심스럽게 주의를 줬다. 뒤늦게 생각하고 웃겨 했던 기억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집을 직접 귀신의 집으로 개조해 이웃들이 드나들며 체험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내부는 섬뜩한 형광 초록빛으로 가득했고, 여기저기서 분장을 한 사람(아마 집주인의 친구나 가족이었을 것이다)들 혹은 모형들이 튀어나왔다. 리얼하게 무서웠다기보다는 경험 자체가 즐거움이 되었다.
할로윈 다음날, 엄마는 내 치아가 썩을 거라며 나의 노력으로 얻은 사탕과 초콜릿들을 전부 가져가 유진 언니네로 넘겨버렸지만, 언제나 내 편을 지켜주던 유진 언니는 엄마 몰래 나에게 간식들을 한 움큼 쥐여주었다. 유진 언니는 나보다 조금 어른스럽긴 했어도, 늘 나와 함께 사고를 쳐주는 역할로 곁에 있었다. 함께 차를 타고 터널을 지날 때면 꼭 숨 참고 소원을 비는 우리만의 습관이자 약속 같은 게 있었는데(그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아마 유행했던 때이다), 난 한국에 와서 유진 언니와 연락이 끊기고 중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 짓을 계속했다. 유치하고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중에 엄마한테서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유진 언니도 그랬다고 한다.
미국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마쳤던 나는 영어 발음이라든가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감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한국에 와 10년간 영어를 묵히고 살았어도, 여전히 발음은 남들보다 우수하고, 매일 머리 싸매고 토익 문제 푸는 사람보다 감으로 찍어 맞히는 문법을 잘한다. 설명할 수 없는 영어가 내 안에 남아 있다. 정동사니 뭐니 하는 건 뭐라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한국에서의 초중고 내내 영어 수업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pp 법칙'이라는 것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는데, 어쨌든 그렇다. 영어가 가히 내 것이라고는 못하지만, 내 안에 잔재처럼 남은 언어들이 나에게 자꾸만 지시를 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많은 영어 단어를 잊어버렸다. 당초 미국에서의 삶을 되짚어 보자면,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영어였고, 가족은 한국인이었으므로 영어를 자주 사용할 일도 없었을 테다. 제뉴어리, 페뷰어리, 마치, 에이프릴(-퍼스트. 가장 익숙한 영어인 이유는 내 생일이기 때문이다)처럼 달을 세는 것, 아니면 계절 혹은 동물 이름이라든가, 숫자 단위라든가...... 아주 기초적인 것들부터 차근차근 공부해야 할 판이다. 영어뿐 아니라 그 어떤 학문에도 열중해본 적 없어 단어 암기에서부터 난항을 겪는 중이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매일 외우면서 매일 잊고 있는데.
밖에서 영미권 외국인을 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아,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는데, 싶다. 저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됐는데, 싶고. 또 다른 우주의 나는 어쩌면 미국에서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한참 힘들고 우울했을 적엔 '한국에 오지 않았더라면'으로 시작하는 가정을 매번 했다. 끊임없는 상상이 질리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일어나지도 않은 허상을 이어붙이는 공상은 가장 무의미하단 걸 알지만, 원망할 대상을 나 자신에서 한국이라는 나라 혹은 날 한국으로 데려온 엄마에게로 옮길 수 있는 좋은 방식이었다.
내 감성에도 맞지 않는 영미권 하이틴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들을 줄곧 찾아보면서, 그 주인공도 아니고, 주인공의 친구도 아니고, 화면에 등장하지도 않은, 각본에 이름조차 없을 조연이 바로 나이길 바랐다. 평범하게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대로 대학교를 가든 취업을 하든 여전히 행복한 상태로 살아갔어야 했다고. 유진 언니가 그랬듯이. 유진 언니와 함께. 행복한 10번의 크리스마스와 할로윈을 놓치지 않고. 그래서 그 자리가 참 내 자리 같다.
추악한 질투나 열등감으로 자리잡은 감정은 아니다. 애초에 엄마도 아빠도 한국인인 데다 뭔갈 바랐으려면 더 깊은 곳으로 거슬러 전세계 양인들을 대상으로, 내가 서양인으로 태어났어야 했다는 아주 사대주의적이고 백인우월주의적인 질투를 했어야 했다. 친구들과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갑작스레 한국행 비행기에 태운 엄마도 더이상 원망은 않는다. 그때의 엄마는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고작 20년밖에, 누군가의 딸로밖에 안 살아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고충이 많았을 것이라고, 딱 그 정도로만 이해한다.
한국에 오면서 속에 얹힌 외로움과 우울감, 자기혐오 기타 등등의 비관이 미국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미국에 대한 그리움이 질투의 모양을 하고서 나타나는 것 같다. 최근 들어 지나친 낙관성을 갖게 된 나를 보고 친구들은 "넌 한국인이 아니야.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라" 같은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러면 나도 "요즘따라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긴 해" 하고 장난처럼 받아치지만, 진심이 반쯤 깃들었다. 양인의 얼굴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어릴 적 상실한 삶, 놓쳤던 기회를 되찾고 또 복구하고 싶은 거다.
기억은 미화되고 추억은 더한 행복으로 포장된다. 그러니까 나는 별것도 아닌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중에, 원하는 대로 미국에 돌아가면 그때는 어떤 모종의 이유로 혹은 아무 이유도 없이 실망하고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하는 노래가 있듯, 행복한 과거는 고스란히 남고, 내가 태어난 산호세의 오코너 병원, 나와 엄마가 머물렀던 비좁은 아파트와 유진 언니의 기억 속 내 웃음들, 강아지 코코와 어릴 적 친구들을 향했던 사랑, 산타클라라, 애리조나, 과거와 기억과 공간은 그대로일 텐데.
그러니까 나만 그곳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기 위해 거금 들여 도시까지 영어 학원을 다니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주 미련해 보인다. 미국에 행복을 두고선 진득한 미련의 알맹이만 쏙 가져와 버렸다. 한국에다 미련을 버리고 미국으로 행복을 되찾으러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다. 미국은 내 고향이고, 한국에 오고부터 괴로운 일들을 겪었으니 내 이야기에 공감한다는 사람은 많겠지. 하지만 그들은 내가 미국 영화를 보거나 거리에서 영어권 외국인 여행객들을 마주칠 때마다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동질감도 이질감도 경이감도 아닌 채 가슴 한편에 묵직하게 들어서는 것을.
나한테 그곳은 과거일 뿐이야
태어나서 자란 곳을 일단 떠나고 나면
다시는 소속감을 느낄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