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4부)
우리 아파트 동의 물 공급을 책임지는 공용 배관이 터졌다. 최고층에서 터져 나온 물이 콘크리트 벽의 틈새를 타고 각 가정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파트 주민들은 돌연 집 안으로 들이닥친 물을 현관 밖으로 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관문을 열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이용해 계단으로 쓸어내렸다. 계단으로 밀려난 물은 한 층 한 층 내려가더니 마침내 1층 공용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집 안 어느 틈을 통해 물이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거실에 물이 차기 전에 얼른 밖으로 내보내는 게 시급했다.
나는 새미를 먼저 올려 보내고 자동차를 주차하러 돌아다녔다. 서둘러 빈 공간을 찾아 차를 댄 다음 다시 우리 아파트 동으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최고층에서 공용배관이 터지는 동시에 물이 사방으로 뿌려지면서 엘리베이터에도 많은 물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첨벙첨벙' 계단을 타고 흐르는 물을 밟으며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 다다르자 새미가 망연자실한 표현으로 서 있었다. 집 안은 이미 물에 잠겨 있었다. 거실, 손님방, 뒷 베란다 공간까지 전부 침수된 상태였다. 다행히 방 앞에 놓인 문턱 덕분에 안방과 옷방은 무사했다. 좀 더 늦게 도착했으면 그조차도 침수되었겠지. 공용 배관이 터졌다는 연락에 무엇보다 가장 걱정했던 건 나지와 바미였다. 평소에도 물이라면 질색팔색 하는 아이들이다. 난데없이 쏟아지는 물난리에 얼마나 겁먹었을까? 새미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둘 다 식탁 위로 올라가 있었다 한다. 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새미를 발견하고는 도와달라는 듯 곧장 울었다고.
침수된 곳 중에는 뒷베란다의 수심이 가장 깊었다. 수심과 물이 거실로 흐르는 것으로 보아 뒷베란다의 틈 어딘가로 물이 들어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검지를 이용해 깊이를 쟀더니 한 마디가 훌쩍 넘었다. 족히 4~5센티는 됨 직했다. 우리는 콘크리트 틈새를 찾기보다 세숫대야로 고인 물을 바깥으로 퍼내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둘 만으로는 흥건히 차 있는 물을 빼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우리의 사정을 알고 이웃집에서 도우러 와 줬다. 알고 보니 모든 집에 물난리가 난 건 아니란다. 공용 배관에서 샌 물이 일부 가정으로 흘러들었고, 그중 우리 집이 가장 심했다고. 아래층과 위층 분들이 오시고 경비원 분들까지 더해 다 같이 물을 퍼 날랐다. 덕분에 1시간 만에 집안에 고인 물 대부분을 빼낼 수 있었다.
물은 다 빼냈으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평소라면 뒷베란다에 아무런 짐도 안 놓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작년 말부터 북카페를 오픈하기 위해 모은 중고책이 박스 채로 쌓여 있었다. 박스도 종이고 책도 종이다. 박스가 물을 먹으면서 자연히 안에 담은 책도 물에 젖었다. 부랴부랴 식탁 위라든지 앞 베란다로 옮겼으나, 맨 하단에 놓은 박스는 겉도 내용물도 이미 흥건히 젖은 상태였다. 물에 젖은 가구와 책을 현관 밖에 놓았다. 젖은 책은 어림잡아 200권 정도 되었을까? 현관문 앞에 책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가게 오픈에 앞서 한 권 한 권 꼼꼼히 확인하면서 샀는데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후우' 깊은 한 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왜 이러나,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물에 젖은 장판을 그대로 두면 곰팡이가 지기 때문에 전부 걷어야 한다. 장판을 드러내고 2~3주 정도 바싹 말려 물기를 없앤 뒤 새 장판을 깔아야 원상태로 돌아간다. 아파트에서 보험 처리를 해서 우리가 비용을 지불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2주는 거실과, 손님방, 뒷베란다의 장판을 드러낸 채 지내야 했다. 콘크리트 바닥은 그 외관만으로도 보기 흉했으나, 냄새는 더 심했다. 바닥을 말리기 위해 보일러 온도를 높이자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바닥에 깔아놓은 신문지에서는 종이 냄새가 콘크리트에서는 시멘트 냄새 따위가 말이다. 구역질이 날 듯 메슥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할 수 없이 안전지대인 안방으로 피신했다. 장판을 교체하는 기간 동안 요리는 물론이고 쉬는 시간도 전부 안방에서 보냈다. 나지와 바미도 돌아다니지 못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야옹야옹'하며 자꾸 울었다. '미안해 애들아. 놀아주기는 커녕 자꾸 안방에만 가두니 말이다.' 하루빨리 원래대로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우리 집이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가게 준비하는 데 이게 무슨 일이냐."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해. 도와줄 테니."라든가 "창업하기에 앞서 액땜했네. 앞으로 떼돈 벌 일만 남았어."라며 저마다 말을 건네며 우리를 위로해 줬다. 책이 젖었다는 말에 도서도 기증받았다. 내 친구, 새미 친구, 그리고 친인척이 100여 권 넘는 책을 선물해 줬다.
사실 가게 준비하는데 온 정신을 쏟느라 집이 물에 잠겼을 당시만 해도 제정신을 추스르지 못했다. 당황한 나머지 헛웃음만 연신 내뱉고, 자꾸 안 좋은 방향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안 그래도 처음 하는 창업이라 걱정거리가 한가득인데 침수로 인해 2배, 아니 3배로 늘어났다. 거기다 생활하는 데 있어 불편 거리까지. 항상 싱글벙글 신나게 뛰어다니는 새미조차 웃음이 없어지고, 내 안에도 짜증이 늘어갔다. 정신적인 피로가 극에 달했을 무렵 주위 사람이 하나 둘 안부를 건넸다. '고생 많다고.' '힘내라고.' '그래도 너희라면 잘 이겨낼 거라고.'
그들의 진심 어린 위로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 덕분에 힘든 시간을 잘 버티고 일어설 수 있었다. 2주 후, 장판 공사도 무사히 마치고, 시공도 예정대로 끝났다. 이제 오픈만 남은 상태이다. 모두의 응원에 힘입어 창업이란 관문까지 열심히 달려가야지. 늘 그래 왔듯 감사하고 지내면 길은 열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