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May 12. 2021

아이들의 공감능력 테스트

실천하는 진정한 공감

순식간이었다. 그것이 내 눈을 향해 맹렬히 돌진한 후 순간적인 찔림이 느껴지기까지. 그 찔림은 꽤 강렬했고 내 눈 어딘가를 자극한 게 분명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두 손은 나도 모르게 내 오른쪽 눈을 감싸 쥐었다. 서서히 고통이 느껴지고 눈에서 무언가 부풀어 오르는 둔탁한 느낌이 들었다. 눈을 움켜쥔 체 곰곰이 생각했다. 이 강렬한 자극이 눈꺼풀에서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눈동자 속에서 느껴지는 것인지. 눈꺼풀에서 느껴지면 그 물체가 내게 돌진한 속도보다 내 반사신경이 빨랐다는 의미다. 고로 빠른 반사신경을 발휘한 나를 칭찬해줘야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뜨고 웃으며 지나갈 일이다. 하지만 그 고통이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거라면 내 반사신경이 물체가 눈으로 들어온 속도보다 느렸단 의미다. 이렇게 되면 일이 커진다. 눈동자가 손상될 수도 있단 얘기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까지 구분할 정신이 없었다. 그냥 눈 어딘가에서 고통만 전해올 뿐.


내가 계속 눈을 못 뜨고 있으니 남편이 와서 물었다.

“아이고 괜찮아? 눈 한번 떠봐”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썼다. 졸음이 몰려올 때 느껴지는 눈꺼풀의 무게보다 한층 무거웠다. 겨우 게슴츠레 뜨니 희미한 불빛이 눈 속으로 들어왔다. 그때 아들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괜찮아? 엄마, 죄송합니다.”

“엄마 괜찮아.”

괜찮다고 아이를 안심시켰지만 진짜 괜찮은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니 방안의 풍경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방에는 종이접기 한 흔적들이 널브러져 있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아이들이 보였다. 내 눈으로 화살같이 날아온 물체는 바로 색종이로 접은 4개의 뾰족한 꼭지가 달린 표창이었다. 아들과 표창 던지기 놀이를 하던 와중 아들이 던진 표창의 한 꼭지가 내 눈을 강타한 것이다.


점점 물체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됐다. 표창이 내 까만 눈동자를 비켜나간 건 틀림없어 보였다. 아들은 자꾸 내가 신경 쓰였는지 미안한 표정으로 내 주변을 맴돌았다.

“엄마 이제 보여. 괜찮아. 괜찮아.”

“엄마 진짜 괜찮아?”

“응 진짜 괜찮아. 엄마 하나도 안 아파. 걱정하지 마. 미안해 안 해도 돼”

난 아들의 불편한 마음이 신경 쓰여 연신 괜찮다며 아들을 안심시켰다.  


표창은 불행 중 다행인지 내 눈꺼풀이 아닌 까만 눈동자도 아닌 흰자 부분을 강타했다. 거울을 보니 흰자 부분이 거무튀튀한 회색빛으로 변했고 잠시 후 회색 빛깔은 빨간 피 색으로 바뀌어 흰자의 위, 아래, 오른쪽 부분을 모조리 물들였다. 눈에서 빨강과 검은색의 콜라보를 보니 내가 봐도 귀신같이 무서워 보였다. 다른 사람은 내 눈을 보고 얼마나 놀랄까.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서라도 외출을 할 때는 필히 안대가 필요했다. 약사에게서 굳이 병원에 갈 필요 없고 안약 넣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다고 얘기를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난 평소와 같이 일상생활을 이어갔다.


다음날 안대를 끼고 마트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안대를 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한쪽 눈만 가렸을 뿐인데 시야가 50% 이하로 줄어든 느낌이다. 한쪽 눈만 가려도 이렇게 불편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 산다면 어떤 느낌일까. 새삼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엄마 눈 잘 안 보이니 내가 안내해 줄게.”

 아이들은 마치 안내견 체험이라도 하듯 나를 안내해준다고 따라나섰다. 양쪽으로 아들과 딸이 내 손을 잡고 ‘나만 따라와’를 외쳐댔다.

‘옳커니. 일부러 더 오버스럽게 행동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몸이 불편한 사람을 얼마나 잘 보살펴주는지 일종의 공감능력 테스트를 하기로 했다. 계단이 있는 부분에서 머뭇거리니 “엄마 이제부터 계단이야. 조심해.”라고 말해주고 일부러 다른 데로 방향을 바꾸며 “이 쪽으로 가야 하나?”라고 말하니 “아니야, 엄마 그쪽이 아니고 내가 가는 쪽으로 가야 해”라고 아이들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이런 상황극은 마트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양파가 어디에 있지? 엄마가 길이 안 보여 모르겠어.”

“엄마 나만 따라와”

하며 첫째 아들이 길을 안내했다.

“엄마 눈 불편하니 양파는 내가 담을게.”

곧이어 둘째 딸이 거들었다. 동생의 양파를 담는 모습을 보고 첫째가 한마디 덧붙인다.

“양파 만지고 눈 비비지 마. 오빠 말 알았지?”

양파를 썰고 눈이 매웠다는 내 이야기를 기억하는 아들은 양파를 볼 때마다 내게나 동생에게 꼭 하는 당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아들은 한 발 앞서서 길 안내를, 딸은 짐 꾸러미를 들지 않은 내 손을 꼭 잡았다.


아이들이 했던 말과 행동을 곱씹어보니 내 마음에도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 온기에는 향긋한 꽃 향기를 담고 있어 기분까지 좋게 했다. 어버이날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는 생각에 눈 다친 사실도 까맣게 잊었다. 단지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공감이 아닌 몸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진정한 ‘공감’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내게 보여줬다.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 서로 찌르고 할퀴는 날카로운 세상 속에서 이런 공감은 더욱 빛을 발한다. 아이들도 '나도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란걸 느끼길, 나 자신을 뿌듯히 여기고 가족을 넘어 주변 사람들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길, 그래서 이 세상이 살만함을 느끼길 바라본다.



이전 23화 연리지처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