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Jun 05. 2021

너구리를 만난 아이들

신세계를 경험하다

“요즘 고민이 뭐예요?”라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난 “오늘은 뭘 먹여야 하나요?”라고 대답하고 싶다. 내가 뭘 ‘먹는지’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무얼 ‘먹여야’하는 지다. 코로나로 학교, 놀이터, 수영장, 식당 등 모든 것이 올 스톱인 된 하노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과 24시간 붙어서 집에서 놀고 잘 챙겨 먹이는 것이다. 하지만 잘 챙겨 먹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주던 반찬을 계속 주면 쉽게 싫증 내고 안 먹는 반찬도 많기에 아이들의 메뉴는 항상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름 ‘하루에 아침, 저녁 두 끼는 밥을 먹고 점심은 간단하게 먹자’란 규칙 아닌 규칙이 만들어졌다. 다른 집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나와 같이 아이들에게 삼시 세 끼를 챙겨주고 있는 친한 동생에게 물었다.

 

“요즘 아이들 뭐 먹여?”

“우리는 그냥 점심은 간단히 너구리 끓여 먹어요.”

“너구리? 아이들 잘 먹어?”

“우리 애들은 잘 먹어요.”


너구리. 참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이다. 어릴 때 내가 자주 먹었던 라면이다. 라면 같기도 하고 우동같기도 한 라면. 평소에 매운 것만 먹다가 오랜만에 순한 맛이 당길 때 찾게 되는 라면, 다시마 한 조각이 포인트인 그 라면 말이다. 어릴 때 항상 너구리를 먹으면 그 다시마 조각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했었다. 먹기엔 왠지 부담스럽게 두껍고 안 먹기엔 너구리의 마스코트를 버린 죄책감이 들고, 결국 난 거의 먹는 쪽을 택했다. 다시마 한 조각을 먹으면 몸에 안 좋은 라면을 먹었다는 죄책감 한 조각도 덜어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생과의 전화통화 후 갑자기 너구리가 먹고 싶어 졌다. 나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데 문제는 아이들이다. 아직 아이들에게 아이들용으로 라면을 끓여 준 적이 없다. 엄마 아빠가 신라면을 먹을 때 옆에서 몇 가닥 물에 씻어 먹은 경력만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 머릿속에는 ‘라면은 매운 것, 어른들이 먹는 것’이란 공식이 박혀 있다. 이 공식을 아이들이 충분히 컸을 때까지 끌고 가고 싶었다. 순간 나는 갈등했다. 이 공식을 깰 것인가 아니면 유지할 것인가. 아이들에게 신세계를 알려줄 것인가 말 것인가.


 결국 고민 끝에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 보자'란 생각으로 마트로 달려갔다. 한국 마트답게 다양한 한국 라면이 형형 색색의 포장지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귀여운 너구리가 그려진 노란색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예전에 본 너구리는 빨간색 포장지였는데 내가 못 본 사이 훨씬 젊어진 느낌이다. 한국 돈으로 1,200원. 한국에서는 정확히 얼마 하는지 모르겠지만 비싸단 느낌이 들어 2개만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의 반응을 모르기에 우선 하나면 끓이기로 했다. 물은 평소보다 많이, 수프는 반만 넣어 나트륨을 줄여주었다. 덩달아 '라면먹이는 엄마'라는 죄책감도 반으로 줄어든 것 같았다. 투명색 물이 금세 살구색으로 변했다. 수프만 넣었을 뿐인데 벌써 라면 냄새가 진동해 온 부엌으로 퍼져 나갔다. 면을 4조각으로 쪼갠 후 뽀얀 국물 속으로 쏙 투척했다. 면발과 국물이 아직 대면 대면하다. 지금이 바로 서로 친해지도록 외부 필요할 때다. 집게로 면발을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공기 반 국물 반의 작업을 반복해줬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고 면발에 국물이 골고루 밴거 같아 한 가닥 먹어보았다. 아직 덜 익었다. 오동통 면발답게 다른 라면보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모양이다. 평소엔 나는 약간 덜 익은 꼬들꼬들한 면을 좋아하지만 오늘은 아이들이 먹을 거니 푹 삶는 쪽을 택했다. 국물 속에서 너구리 마스코트인 다시마가 떠올랐다. 내가 예전에 보았던 비주얼 그대로다. 학창 시절 친구를 만난 듯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역시 다시마가 있어야 너구리지. 중간에 작은 미역 조각들과 너구리 모양의 어묵도 눈에 띄었다. 아이들이 너구리 모양의 어묵을 보고 ‘귀엽다’를 연발했다.  본 사이 귀요미까지 갖추다니  너구리가 새롭게 보였다. 라면 냄새가 곧 온 집안으로 퍼져갔다. 아이들은 이미 냄새만으로 먹을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드디어 너구리를 잡을 시간이다. 아이들 대접 두 개에 덜어내니 양이 딱 맞았다. 첫 정식적인 라면을 , 라면 국물에 담궈진 라면을 처음으로 먹어보는 아이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평소 매운 걸 잘 못 먹는 첫째 아들은 한 입 먹고 계속 ‘헤헤’ 거리며 부채질을 했다. 연신 물을 마시고 물을 더 부어 몇 젖가락 먹더니 결국 “나 그만 먹을래”를 선언했다. 평소 입이 짧은 첫째 아들에게 순한 맛 라면도 매운 모양이다. 속으로 '라면을 좋아하지 않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둘째 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미 딸내미는 포크로 면치기를 하며 냠냠 쩝쩝 맛깔나게 먹고 있었다.   

“엄마 이 라면 정말 맛있어. 아기들에게 이게 딱이다.”

이 말이 너무 귀여워서 너털웃음이 나왔다. ‘라면은 매운 것’이란 공식이 딸에게 깨진 순간이다. 맛있게 한 그릇을 뚝딱하고 곧 이은 한 마디.

“엄마 하나 남은 거는 내일 먹자.”


5살 딸아이 에도 라면은 맛있나 보다.

"그래 라면 정말 맛있지. 하지만 매일 먹으면 몸에 안좋아요."  

라고 했지만 마음속으로 다른 말을 다.

'엄마도 라면 무척 좋아해서 혼자 있을 때 자주 먹었어. 매일도 먹을 수 있단다.'


라면을 즐겨먹던 나는 이제부터 딸을 위해서라도 라면이 싫은 척 연기를 해 볼 참이다. 아직 못 잡은 너구리 한 마리를 창고 저어기 어딘가 위칸에 고이 보관해 뒀다. 잊혀질 때쯤 한 번 꺼내 봐야지. 그런데 자신이 없다. 어쩌면 아이들 몰래 내가 먼저 잡을 지도 모르겠다. 라면은 딸아이 말처럼 정말 맛있으니깐.








이전 24화 아이들의 공감능력 테스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